[특집] 심출가心出家 에는 나이가 없다

2015-10-08     조혜영

특집 : 100세노인, 출가하다 - 행복하게 늙는 법

1. 부처님, 늙음을 깊이 관하다 / 김재성
2. 부처님은 이와 같이 나이 들었다 / 조정육
3. 무여 스님이 준 화두, ‘65세, 나는 누구인가?’ / 김성동
4. 심출가心出家 에는 나이가 없다 / 조혜영

경전은 늙음, 병듦, 죽음이라는 세 가지가 없었다면 붓다는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늙음에 대해 “부끄러워할지어다. 가련한 늙음이여,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는 늙음이여 잠시 즐겁게 해주는 사람의 영상, 늙어감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늙음 자체의 부정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늙지 않으려는 것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2천 5백 년 전에도 사람들은 생에 대한 집착이 깊었지만, 오늘날 늙지 않으려는 집착은 물질문명과 생명과학기술과 결합해 더 단단해지고, 때론 왜곡되어 나타납니다. 불교의 눈으로 볼 때 늙음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회피하려는 모습은 오히려 고통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되면서, 불안이 더 커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늙는다는 이 평범한 사실 속에서 이를 불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부처님의 삶과, 그리고 이를 따르는 불자의 삶에서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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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렀던 여름이 자취를 감췄다. 한순간이다. 계절은 다시 가을. 수확이 끝난 들판은 허허롭고 바스락 부서지는 낙엽은 애처롭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고통이라고. 그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자 현대인들은 안티에이징anti-aging에 열을 올리고 노후대책을 위해 젊은 날을 허비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오히려 고통을 만드는 우스운 모습이다. 무상無常의 진리를 몸소 깨달아 좀 더 의미 있는 노년을 보내고 있는 불자들을 만났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던가. 세속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 마음으로 출가한 이들이다.

 

| 부처님이 숨 쉬며 걸어가신 길을 걸으며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반체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오른다. 총살 직전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5분간 가족과 친구에 대한 미안함, 삶에 대한 후회 속에 괴로워하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다. 탄환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리고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낀 그 순간, 때마침 사형 대신 유배를 보내라는 황제의 전갈이 도착한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은 180도 바뀐다. 불평불만으로 뒤덮여 있던 마음이 기쁨과 감사함으로 충만해지고, 삶은 ‘5분의 연속’이라 여기며 모든 시간을 소설쓰기에 불태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죽음을 가까이서 마주한 이들에게 삶은 더욱 절실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늙는다는 것은 어쩌면 큰 축복일지 모른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이에게 늙음과 죽음은 두렵고 피해야 할 장애가 아니라 최고의 수행도구인 것이다.

조계사 선림원에서 3학기째 참선과 교리를 배우고 있는 한계진(83) 보살에게 하루하루 매순간 순간은 행복의 연속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에너지 넘치는 한계진 보살의 삶은 2년 전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전까지, 그러니까 80년간을 그냥 사는가보다 하고 살았어요. 잘 먹고 잘 사는 게 행복인 줄로만 알았죠. ‘스님들도 참선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어렵다는데, 감히 내가 어떻게 하겠어?’ 하며 한 달에 한 번 법회에 나가는 걸로 위안을 삼았어요. 그런데 2년 전, 인도를 다녀온 후로 마음에 변했어요. 부처님이 숨 쉬며 걸어가신 길을 나도 똑같이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심이 나더라고요. 한국에 돌아와 바로 선림원에 입학하고 늦은 나이지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자칫 잘못했으면 이 공부를 모르고 죽었을 수도 있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루하루 만나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진하게 느껴집니다.”

스님들처럼 세속을 떠나 출가를 한 것은 아니지만, 인도 성지순례 이후 한계진 보살의 마음은 이미 출가자나 다름없다. 늦게나마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가겠다 마음먹은 순간, 80년 넘게 갇혀있던 자기 안의 부처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했다.

“중생놀이에 빠져있으면 영원히 중생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나는 부처다.’라고 믿으니 마음이 더 넓고 깊어지는 것 같아요. 이제는 행行을 실천해야죠.”

오전에 선림원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한계진 보살은 봉사활동을 하러 어린이집으로 향한다. 아이들을 위해 재미있는 동화구연을 들려주기도 하고 장구, 부채춤 등을 놀이로 함께 하며 국악을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을 기쁘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니까 그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행복은 자기가 마음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주변에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먹고 자기만 하거나 치매에 걸린 친구들이 많아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꼭 이렇게 얘기해요. 죽을 때, 마음 빼곤 아무것도 못 가져간다. 마음을 닦아야 해. 마음을….”

한계진 보살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계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며 일체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를 한다. 열정은 젊은이 못지않지만 역시 세월의 흐름은 비껴가지 않는가보다. 망막증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책을 읽는 데 불편함이 있고 가까이 다가와야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눈은 어둡지만, 마음은 새로운 길을 훤히 비추고 있습니다. 저는 뒤늦게 부처님 공부를 만났지만 젊은 사람들은 좀 빨리 만났으면 좋겠어요. 노후대책에만 신경을 쓸 게 아니라, 사후대책에도 신경을 써야죠. 참선이야말로 최고의 사후대책입니다.”

한계진 보살은 이야기 내내 큰소리로 웃었다.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난다는 열일곱 소녀의 웃음이었다.

“수업 중에 스님이 중도中道를 말씀하시기에 제가 손을 들고 질문했어요. 스님, 중도대로 살려면 이제 깔깔깔 소리 내 웃지도 못하겠네요. 스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깔깔깔 웃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웃으며 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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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계절을 돌아보는 심출가

작년 6월 한마음선원 안양본원에 있는 한마음과학원에서 ‘행복한 사계절’이란 이름의 마음공부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행복한 사계절’은 만남과 인연, 감사, 용서와 화해 등을 통해 ‘변화하는 나’를 만나고 노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기획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김영숙(76) 보살에게도 늙음은 삶의 태도를 바꿀 수 있게 해 준 자극제가 되었다.

“환갑이 넘으니 그제야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더라고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부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 절절해졌습니다. 행복한 사계절 프로그램을 통해 마음의 계절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내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있으면서 싹이 안 난다고 불평만 하며 살아왔더라고요, 제가.”

무상하게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그저 자연의 순환일 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추운 겨울도 언젠가는 끝이 나고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우주만물은 삶과 죽음을 넘어 영원의 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 순간을 사는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내 마음이 따뜻한 봄인지, 탐·진·치로 얼어붙은 메마른 겨울인지만을 알아차리면 그 뿐.

“100여 명이 참여했어요. 7, 8명씩 조를 나누어 몇 십 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온 삶의 문제들을 하나둘 꺼내놓기 시작했죠. 부부간의 문제, 자식 문제, 누구나 살다보면 어쩌지 못하는 문제를 하나씩은 갖고 있잖아요. 나이가 70이 넘어도 마음공부를 안 하면 그 문제가 그대로 있어요. 그냥 후회하고 한탄만 하고 말았을 텐데, 도반들과 나누면서 엉켜진 것들을 풀어낸 것 같아요. 일흔이 넘은 거사 분들이 소리 내 눈물을 흘릴 때는 모두의 업장이 함께 녹아 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김영숙 보살은 바람도, 새소리도, 냇물 소리도 모두가 법문이라는 대행 스님의 말씀이 나이가 드니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고 한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부처님 학교에 간다는 생각으로 매일 매일 절에 와요. 아픈 곳도 없고 절에만 오면 기운이 납니다. 친구들 모임 같은 유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예전의 습기에 흔들릴까봐 무조건 절에 옵니다. 전에는 고기도 좋아하고 식탐도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고 요즘은 절에서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네요.”

행복한 사계절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매주 제주에서 올라온 윤기홍(73) 거사도 3년 전부터 죽을 때가 다 됐다고 생각하니 불교공부가 간절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법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잖아요. 비행기 타면 1시간이면 가는 거리인데, 못 갈 게 없죠. 55세에 처음 불교를 접했는데, 처음 7, 8년은 열심히 하다가 사회에서 박수 쳐주는 곳에 기웃거리다 보니 불교공부에서 점점 멀어지게 됐습니다. 그동안은 머리로만 이해했던 공부였죠. 근본자리인 내 마음을 믿고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을 하며 살아가고 싶어요. 건강도 다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한 생각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마음의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살아서 행복하면 행복한대로 죽게 되겠죠.”

심출가에는 나이가 없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그 마음은 더욱 절실하게 빛난다. 문득 예전에 한 노선사에게 들었던 말씀 하나가 떠오른다.

“내 삶의 라스트 씬이 좌탈입망坐脫立亡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