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정년을 앞둔 교수의 화두, 김종선 불자

은퇴 후 선업善業을 쌓다

2018-05-04     김우진

[특집]은퇴 후 선업善業을 쌓다

올해 우리나라 평균 퇴직 연령은 55세입니다. 향후 100세 시대를 생각하면,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는 모든 사람들의 화두가 됩니다. 은퇴의 연령은 낮아졌지만 평균 수명은 증가하는 우리 세대. 은퇴 후의 시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불광이 만난 불자 은퇴자들은 언제나 활기 넘쳤습니다.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아 자신의 삶을 주도하기에 누구에게도 소외되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 당당했습니다. 은퇴 이후의 삶은 알차고 여법했습니다. 은퇴 후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불자는 어떻게 은퇴 이후의 계획을 세우면 좋을까요. 설레는 인생 2막,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자신에게 선업을 쌓는 이들을 만나봅니다.

01    교편 내려놓고 전통등 만드는 이정희 불자  김우진
02    사진블로그를 운영하는 이기룡 불자  유윤정
03    포교사로서의 삶 살아가는 정광성 불자  유윤정
04    정년을 앞둔 교수의 화두수행, 김종선 불자  김우진

정년을 앞둔 교수의 화두

새벽 3시 50분. 눈을 뜨고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섰다. 15분 거리의 법당까지 천천히 포행하며 마음을 살폈다. 여명이 트기 전, 어두운 법당에 불을 밝히고 다기를 올리니 도반들이 하나둘 법당에 들어섰다. 함께 새벽기도를 올리고 고요히 앉아 한 시간 가량 좌선에 들었다. 매일 아침이 그렇다. 올해 정년을 앞둔 김종선(66) 건국대학교 교수를 만났다.

 

|    바쁘게 달려온 60년

사진 : 최배문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셨잖아요. 선각자들의 삶을 보면 대자유를 찾아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더라고요. 힘들더라도 혁신적인 길로 가는 그 모습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유로운 삶을 찾아 나섰던 것 같아요. 괴로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찾는 삶. 그동안의 제 삶을 돌아보니 그렇게 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다수가 가는 길로 가지 않고, 아쉬움이 들 때 버리고, 놓고, 떠나고, 새로 시작했습니다.”

30대 초반까지의 김종선 씨는 낮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연구하고 저녁에는 건국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삶을 살았다. 비록 시간강사였지만, 정교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국제무역을 전공한 그는 무난히 학자와 교수의 길을 걷는 듯 했지만,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무역을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책속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딪혀야겠다.’ ‘무역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그리고 입으로 떠드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몸으로 체득하고 싶었다. 미련을 두지 않으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1987년, 35세의 나이에 전경련 연구원과 시간강사 자리를 그만두고 창업을 했다. 인생 2막이었다. 사업가로 살아가며 무역 사업과 태양에너지 사업 두 회사를 운영했다. 바쁜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25년이 흘렀다. 그동안 무역회사는 중국과 활발히 교역하여 크게 성장했고, 태양에너지 사업도 대체에너지가 각광 받으며 잘 운영되었다. 

60세를 맞이했다. 젊은 날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자리를 떠났다. 태양에너지 사업은 함께 동업한 친구에게 지분을 모두 주고 나와 버렸고, 무역 회사는 10여 년간 함께 일한 아들에게 맡겨버렸다. 다시 자유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    인생 3막, 불교를 만나다

연구원을 그만 뒀을 때는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사업을 그만 뒀을 때는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있었다. 마침 함께 공부를 했던 후배에게 연락이 왔다. “학위도 있고, 그간 실전에서 쌓아온 경험도 있고, 학교로 돌아와서 어린 후배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 어떻습니까.” 충주에 있는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로 가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이 은퇴 후의 삶이 시작되는 환갑 전 후를 인생 2막이라고 표현하는 데, 제 삶은 3막이라 말하고 싶어요. 인생의 중요한 기점을 나누니 3막 정도가 좋을 것 같더라고요. 제가 불교를 만난 것이 바로 3막의 시작이니까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쯤, 우연히 단양 구인사에서 하루를 묵었다. 김 교수는 비록 ‘냉담신자’였지만, 20대 때부터 가톨릭 신도였다. 그런 그에게 하룻밤 사찰에서의 일상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특히 스님과 나눈 차담은 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당시 그가 준비하던 논문의 주요 내용이 부처님 가르침 속에 이미 내포되었던 것이다.

‘에너지자원경제’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는 그에게 불교의 공양은 효율적인 에너지 섭취였고, 스님들의 장좌불와長坐不臥 모습은 획기적인 에너지 유지법이었다. 불살생, 무소유, 더 나아가 미니멀리즘까지 이어지는 키워드들이 그가 준비하던 논문과 오버랩 되었다. 그의 인식 속에 새로운 축이 생겼다.

시절인연이었던가. 60세가 되어서야 불교가 다가왔다. 명상에도 관심이 생겨 방법을 구하는 중이었고, 채식도 시작하던 때였다. 후학을 양성하던 그는 캠퍼스에서 강의를 하는 시간 외에는 불교에 푹 빠졌다. 그간 생각하던 것들과 불교가 조화로웠다. 체득한 경험이 그에게 길이 되었다.

“수행을 하니까 첫째로 몸이 가벼워집니다. 제 몸을 관찰하며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는데,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것 같아요. 생기를 되찾는다고 하죠. 그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음이 편안해요. 고요한 그 상태가 정말 좋습니다.”

김 교수는 정토회를 만나 수행자가 되었다. 기초교리에서 경전대학, 수행체험 등 느지막이 알게 된 불교라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했다. 방학 때는 장기간 수행프로그램을 찾아 정진하기도 했다. 
정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맡은 강의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또 자택에서 가까운 서울 캠퍼스로 올라왔다. 올해는 일주일에 하루만 학교로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이외의 시간은 수행과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사진 : 최배문

|    수행자의 일상

수행을 시작하고 살이 많이 빠진 그에게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사업하던 시기 김 교수는 몸무게가 100킬로그램 가까이 나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좋지 못한 식습관을 가지고 살았었다. 배도 많이 나왔고, 신체 전반에 걸친 불균형이 그의 건강을 위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규칙적인 식사와 채식으로 건강을 유지한다. 채식과 함께 생식을 시작했다. 가능하다면 불을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 당근을 썰어먹고, 배추를 뜯어 먹고, 현미나 콩을 물에 오래 불려서 먹는다. 인생 3막 이후 식습관에도 신경 썼다. 음식을 조절하는 것도 수행의 일부라는 그다. 

“채식을 하는 지금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상의 컨디션입니다. 몸은 가볍고, 정신은 맑고 또렷합니다.”

‘적게 먹고 적게 쓰고 적게 잔다’ 이 생각으로 그는 하루하루를 산다. 항상 규칙적인 시간에 잠든다. 새벽이면 일어나 기도와 수행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그는 항상 자신의 몸을 살핀다. 그에게 은퇴 후 계획을 물었다. 새로운 곳에서 더 많은 공부와 더 깊은 수행을 하고자 했다. 

“가능하다면 중국이나 대만 쪽에서 수행하고 싶어요. 인도와 스리랑카도 좋고요. 남방의 수행자들을 본 적이 있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해외의 수행 문화는 우리나라와는 또 다르더라고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습니다.”

은퇴 이전부터 부지런히 공부하고 있는 김종선 교수. 경전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불교인재원에서 여는 경전 강좌도 듣고 있다. 『금강경』, 『육조단경』, 조사들의 선어록과 니까야는 물론이고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불교와 관련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고 있다. 

“공부할 것들이 많더라고요. 봐야할 책들도 많고요. 그래서 부자가 된 기분입니다. 제 등 뒤로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니 정말 행복합니다. 환갑이 지나고서 든 생각인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갈 곳이 있다는 것이, 또 하루하루 할 것이 있다는 것이 참 기쁜 일인 것 같아요. 늦은 나이에 불교를 만난 것이 오히려 남은 날에 대한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불교 공부를 하면서 불교가 미래세대와 젊은이들에게 정말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또 “오랫동안 축적해놓은 콘텐츠를 현대에 맞게 가공한다면 큰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했다.
“수행과 공부 외에도 불교와 채식을 대중에게 알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좋은 가르침을 어떻게 가공할 수 있을까?’ ‘어떤 콘텐츠를 만들어야 미래세대에 통할까?’ 이 물음이 교수로써 마지막 화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