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평택 스리랑카사원 마하위하라 담마끼띠 스님

“이 공간에 있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2016-07-11     모지현

우리가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

    “이 공간에 있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미얀마인들을 위한 미얀마인들에 의한 미얀마인들의 안식처
    유럽에 한국의 禪을 심는 벽안의 스님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나누고 환희심을 베풀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한국불교 안에 세계불교가 있다. 티베트, 스리랑카, 대만, 미얀마, 헝가리 등에서 출가해 한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다. 주로 국내에 있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전법활동을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의 불자들도 이들이 세운 사찰에서 신행생활을 한다. 10여 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에 익숙한 불교의 모습이 다양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출가해 한국불교 전통인 선禪 수행을 국내외로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2.png
 
 
 
 
 
행복한 머무름터, ‘마하위하라’
처음 한국을 찾은 해에 3개월간 한국을 여행한 스님은 스리랑카와는 사뭇 다른 대승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이듬해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2009년부터는 동국대학교에서 ‘초기불교에 나타난 대승공관의 기초’를 주제로 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유학을 하며 당시 개운사 주지였던 공운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스리랑카 젊은이들과 모여 신행모임을 꾸려 ‘자비불자회’라 이름 붙였다. 지금은 ‘담마프렌즈’로 확대 운영하고 있다. 
 
스님은 학업에 매진하는 틈틈이 스리랑카 동포 만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울산과 충주, 포천, 안산, 천안 등 이주 노동자가 밀집한 지역을 순회하면서 법회를 열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거제도나 제주를 찾기도 했다. 법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공간이 필요해졌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2014년 평택에 법당 건립을 위한 부지 500평을 사들였다. 노동자들이 십시일반 도왔다. 저마다 5~10만 원씩을 출연했다. 최종적으로 마련된 돈은 8,000만 원. 물론 은행의 도움도 받았다고 담마끼띠 스님은 웃으며 말했다.
 
2015년 조립식 법당이 완공됐다. ‘마하위하라Maha-viha-ra’라고 이름 지었다. ‘마하’는 위대하다는 뜻도 있지만 ‘행복’을 말하기도 한다. ‘위하라’는 ‘머무른다’는 뜻이니 직역하자면 ‘행복한 머무름터’ 정도 되겠다. 그 공간에 있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도솔천을 그리면서 절 주위로는 스리랑카 양식의 구름 모양 담을 쌓았다. 지금으로써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지만 내년도부터는 법당과 쉼터와 스리랑카 문화원이 한데 모인 센터를 건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삶의 터전도, 말투도 이제는 한국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이 된 스님에게 스리랑카 불교에 대해 물었다. “스리랑카불교는 인도에서 전래했지만 오히려 인도보다 순수한 불교가 남아 있어요. 인도에서 불교는 이슬람과 힌두교 사이에서 희석됐죠. 그런 의미에서 스리랑카는 유일하게 불교의 원형이 남아 있는 나라에요. 태국과 미얀마, 라오스 등 남방불교에 퍼져 있는 많은 경전도 스리랑카에서 탄생했습니다.” 스님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1.png
 
3.png
 
 
| 탄생과 함께 불교와 인연을 맺는 스리랑카인
스리랑카불교는 남방불교다. 상좌부라고도 한다. 부처님 재세 시 가르침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의미다. 암송문화가 번성했고 자연스럽게 교학이 발전했다. 남방불교와 대승불교는 아라한과 보살에의 서원이라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지만, 담마끼띠 스님은 두 종파의 차이보다는 모두가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됐음을 강조했다. 
 
“사회에 관심을 갖지 않고 수행에만 관심을 두는 상좌부와 사회적 보살사상과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핵심인 대승불교는 모두 같은 나무에서 나온 가지인데 문화적 차이로 달라진 거죠. 같은 맥락으로 불교가 한국에 전래해서는 ‘한국불교’가 만들어졌고 티베트에 가서는 ‘티베트불교’가 됐어요. 같은 대승인데도 다른 이유는 불교가 가진 성품 자체가 여유롭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스리랑카에서는 이미 기원전 1세기부터 대승불교와 남방불교가 공존했답니다.”
 
스리랑카는 16세기부터 서구 열강들의 침략으로 위협받았고, 특히 영국이 통치했던 100여 년 간은 수계조차 하지 못할 만큼 불교에 대한 탄압을 받았다. 18세기 후반부터 다시 불교의 싹을 틔운 스리랑카인들은 불치사와 보리수나무에 대한 경배와 애정을 바탕으로 불교를 종교 이상,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 
 
담마끼띠 스님에 의하면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꼭 가야 하는 특별한 장소도 아니다. 그보다는 일반인의 생활에 밀착한 생활불교라는 설명이다. 그들은 탄생과 함께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마을의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는 스님들은 각 가정과 가족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 스님들이 기꺼이 움직인다는 믿음이 있고 그들은 실제 영향력을 행사한다.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신뢰와 힘이 스님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이라는 단서가 붙기는 한다.
 
흔히들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라고 꼽는 나라가 있다. 스리랑카도 그 중 하나다. 아직도 유효할까. 담마끼띠 스님은 스리랑카의 불교(혹은 문화)도 글로벌시대와 자본주의적 흐름에서 빗겨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각종 통신기기와 SNS의 발달로 젊은이들의 시야가 트였다. 좁은 섬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채로 살 수는 없는 청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인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북인도의 작은 도시 레에서 목도한 자본주의의 장악력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혹자는 한국이 ‘헝그리 정신’으로 반백 년만에 이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물질만능주의, 인간존엄 상실, 천민자본주의 등 여러 문제에 봉착했다고도. 담마끼띠 스님은 그것이 특별히 한국이 잘못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는 아니라고 봤다. 경제사회의 부작용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가령 스님의 화두는 이런 것이다. ‘스리랑카가 한국만큼 발전했을 때에는 얼마큼의 행복이 남아 있을까?’
 
 
| 외국인 스님이 생각하는 외국인 스님의 장점과 사용법
스리랑카에서 인생의 전반기를 보낸 담마끼띠 스님이 완전히 낯선 세상에 적응하기까지는 역경도 있었다. 스리랑카와 한국은 여러모로 다르다. 계절이 그렇고 음식이 그렇다. 더욱이 한국은 ‘일하는’ 문화다. 일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면, 뭔가를 하지 않으면 게으른 것처럼 여겨진다. 반면 더운 나라 사람들은 좀처럼 서두르지 않는다. ‘빨리빨리’의 나라에서 느린 성정의 사람이 적응하는 것이 퍽 쉽지 않았으리라 수긍이 된다. “처음엔 너무 힘들었다.”면서도 스님은 “절에서 일을 많이 한다고 병이 나지는 않았다.”고 웃었다. 
 
담마끼띠 스님 자신도 겪었지만, 한국문화에 대한 오해에서 야기되는 ‘관계 불량’은 스리랑카 동포들이 매일 마주하는 노동현장에서도 흔한 일이다. 의사소통과 문화의 차이로 인한 갈등을 중재하는 것이 스님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무이기도 하다.
 
“한국은 보이지 않는 계급사회예요. 피라미드 구조죠. 위에서 쪼이면 아래를 쪼는 구조 속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래에 있는 노동자들이 만나는 한국인들은 대개 갑자기 화내는 사람들이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도 그 구조 속에 있는 것일 뿐, 정말로 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눠요.”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 등 법률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도 스님은 동분서주한다. 90%가 언어의 문제인 만큼 한국인들의 도움도 절실하다. 의료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주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문제에 우리가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이주 여성이라는 이유로 황새가 아이를 물어다 주거나 아이를 다리 밑에서 주워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적절한 의료환경이 필요하다. 평택 지역 교회에서는 이미 병원과 연계한 진료비 지원 등을 실시하고 있다고 담마끼띠 스님은 전했다. 교회의 지원으로 태어난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기독교인이 될 인연을 잡고 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관심만 기울인다면 주변 사찰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에서는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꾼다. 한국에서 4만여 명의 스리랑카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1년에 5천 명의 노동자가 새로 유입된다. 담마끼띠 스님은 이 태생적인 불자들이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한국사회에서 문제가 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이해할 수 있는, 설명해서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정신적 구심점이 되고 싶다.
 
같은 이유로 마하위하라 법당에서는 자비명상을 한다. “스리랑카에서 10만 원을 벌 때 한국에서는 100만 원을 벌 수 있을지언정 더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합니다.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죠. 문제가 돈에 있는 건 아니에요. 싸우려는 마음, 행복하지 못한 마음은 자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예요. 그나마 의식적으로 탐진치를 다스릴 수 있는 공간이 절이기 때문에 절에 와야 하기도 하고요.”
 
시간이 갈수록 사람 사는 맛보다는 기계라는 단어에서 묻어나는 특유의 비린 맛이 입안을 맴돈다. 기계화 되었다고 사람들이 기계처럼 단단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다들 아파도 안 아픈 듯 살아간다. 감정은 사라진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힘든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고, 속으로는 작은 것에도 많이 흔들리면서 아픔을 감추게 된다. 비단 스리랑카 노동자만이 아닌 현대 한국인들에 대한 스님의 진단이다.
 
내친김에 스님은 외국인 스님의 장점과 사용법까지 자세히 일러준다. “한국인들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많고 폐쇄적이에요. 나는 외국인이고 스님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지가 커요. 젊기도 하고요. 한국의 큰스님들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담거리도 가벼운 마음으로 내놓을 수 있죠.”
 
담마끼띠 스님의 한국행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본다. 그곳과는 다른 불교를 알기 위한 구법求法일까. 이주 동포들, 나아가 한국의 불자들에게 스리랑카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전법傳法일까. 순서와 과정과 결과가 뒤섞이더라도 멀리 실론에서 온 이 스님이 법法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은 명징해 보인다.                     
 
 
 
ⓒ월간 불광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