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평 미얀마선원 우 두라 스님ㆍ위 세이따 스님

미얀마인들을 위한 미얀마인들에 의한 미얀마인들의 안식처

2016-07-11     정태겸

우리가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

    “이 공간에 있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미얀마인들을 위한 미얀마인들에 의한 미얀마인들의 안식처
    유럽에 한국의 禪을 심는 벽안의 스님 
    “대중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나누고 환희심을 베풀겠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길 바랍니다.”
 
한국불교 안에 세계불교가 있다. 티베트, 스리랑카, 대만, 미얀마, 헝가리 등에서 출가해 한국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있다. 주로 국내에 있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전법활동을 하지만, 적지 않은 한국의 불자들도 이들이 세운 사찰에서 신행생활을 한다. 10여 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일이다. 한국불교의 전통에 익숙한 불교의 모습이 다양화되고 있는 것이다. 또 외국인으로 한국에서 출가해 한국불교 전통인 선禪 수행을 국내외로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서 수행하는 이유를 통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한국불교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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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불탑과 이주노동자
“미얀마선원에 갑니다.”
 
이 한마디에 ‘불교를 잘 모르는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미얀마선원에 간다는 말에는 십중팔구 이런 말이 따라 붙었다.
 
“이야, 좋겠네요. 가서 좋은 말씀 많이 듣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와요.”
 
황금 불탑의 나라에서 온 스님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니. 잘 모르는 그들에게 미얀마선원은 분명 금빛이 번쩍거리는 남방 특유의 사원으로 그려졌을 게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미얀마선원은 결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부평역에서 보통 걸음으로 10여 분. 미얀마선원 측에서 알려준 주소를 따라 찾아간 곳은 부평역 뒤 대로변에 있는 빌딩이었다. 간판도 없고 미얀마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빌딩의 겉에서는 분명히 그랬다. 어쨌든 그 건물의 6층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미얀마 이주노동자들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적잖이 어색해하는 눈치다. 이곳은 평범한 빌딩 6층의 일반적인 가정집 구조였다. 거실에 부처님을 모시고 각각의 방이 있고 주방과 세탁실이 딸린. 어디에서도 황금빛 사원의 흔적은 없다. 비로소 저쪽 방문이 열리고 미얀마스님 두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평 미얀마사원에는 세 분의 스님이 있다. 주지인 쑤 망갈라 스님과 우 두라 스님, 그리고 위 세이따 스님. 우 두라 스님과 위 세이따 스님은 공동으로 운영책임을 맡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한국 사찰의 소임 중 원주의 역할을 의미하는 모양이었다. 마침 사원을 찾은 날 주지스님은 미얀마에 잠시 들어가 부재 중이었다.
 
“저희가 이사온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어요. 정리가 좀 안 됐어요. 이해해주세요.”
 
약간은 서툰 한국어로 스님들이 먼저 양해를 구했다. 이 빌딩에 미얀마선원이 있다는 어떤 표식도 볼 수 없었던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원의 안쪽도 아직은 정리가 덜 끝난 모양이었다. 스님들은 이 사원이 한국에 생긴 첫 번째 미얀마사원이라고 했다. 지금은 부평에만 두 개의 사원이 더 있다고, 또 대구와 부산, 광주에도 미얀마사원이 더 있다고 했다. 부평 미얀마선원의 공동 운영책임자인 위 세이따 스님은 대구에 있는 ‘찌따수카’ 사원을 운영하느라 보통은 대구에 머물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얀마불교계는 왜 한국에 이토록 많은 사원을 세웠는가, 그 물음에 스님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이 사원은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곳이에요. 한국 분들도 잘 알다시피 이주노동자들은 여러모로 부당한 처우를 많이 받았잖아요. 미얀마 사람들을 타겟으로 한 타 종교의 선교행위도 지나칠 만큼 심했고요. 그래서 미얀마 사람들이 먼 한국 땅에서 하루하루를 잘 버텨낼 수 있도록 불교계가 안식처를 만든 거죠.”
 
 
| 이주노동자들, 자신의 손으로 사원을 세우다
미얀마사원이 만들어진 것은 애당초 전법이나 수행법의 전파가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위빠사나 열풍이 일면서 미얀마사원을 찾아 위빠사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들을 위해 위빠사나 명상 강좌나 미얀마어 강의, 빨리어 강의 등을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최우선의 목적은 아니다. 미얀마사원은 오로지 자국민들을 보호하고 그들이 한국땅에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한국 땅에 처음 미얀마선원이 생긴 것은 2002년경. 당시 미얀마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힘들어도 찾아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었고 자신들의 종교생활을 이어가기가 너무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몇몇 미얀마인들이 모여 사원을 만든 게 부평 미얀마선원의 시초다. 이 소식이 미얀마에 전해지자, 미얀마불교계에서는 한국의 미얀마인들을 위해 스님들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사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재밌는 점이 있었다. 각각의 사원들이 모두 같은 종파가 아니라는 점.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미얀마라는 나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얀마는 100개가 넘는 민족들이 모여서 구성된 나라다. 가장 인구수가 많은 민족은 8개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전체의 60%를 차지하는 게 버마 민족이다. 미얀마불교는 각 민족에 따라 종파가 나뉘어진다. 미얀마불교는 부처님 재세시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어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소의경전에 따른 종파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현재 한국에 개설된 미얀마사원들은 각 종파에 따라 자기 민족의 스님을 모시고 운영하고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다.
 
사원은 한국의 미얀마인들이 해고되고 갈 곳이 없어지면 이곳에서 일을 구할 때까지 먹고잘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일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이주노동자 모임을 통해 직간접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교통사고나 산업재해로 뜻하지 않게 사망하는 이들에게는 스님들이 나서서 장례식까지 치러준다. 한마디로 한국 땅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나갈 때까지 미얀마인들이 마음 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제공하는 셈이다. 스님들은 “육체적 고통에 정신적 도움을 제공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사원은 이 사원에 모이는 불자들이 매달 십시일반으로 보시한 자금으로만 운영된다. 때로는 외부의 기부를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철저히 보시로 해결한다. 대단한 것은 그렇게 모은 돈을 아끼고 아껴 지금의 공간을 매입했다는 것. 월세로 빌린 공간에서 집 주인의 눈치를 봐야만 했던 생활은 그렇게 15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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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불과 명상수행으로 이어가는 신행의 길
미얀마선원의 일과는 한국의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아침 6시 아침예불로 하루가 시작된다. 한국의 전통사찰과 비교하면 3시간 늦게 하루를 여는 셈이지만, 사원의 설립 목적이 자국의 이주노동자들의 생활을 돕는 데에 맞춰져 있다는 걸 상기하면 쉽게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저녁 예불은 오후 7시. 역시 퇴근하고 돌아오는 이들을 위한 배려다. 예불이 끝나면 곧이어 수행에 들어간다. 당연히 위빠사나 명상이다.
 
“미얀마불교는 부처님 재세 당시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기 위해 정부차원의 노력을 하고 있어요. 경·율·논 삼장을 완벽히 체득한 사람들에게는 삼장법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시험은 처음 도입된 이래 지금까지 65년간 13명밖에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만큼 어려운 시험이지만, 통과하고 나면 국가차원에서 큰 스승으로 모십니다. 하지만 경전공부만큼 중요한 게 명상이에요. 경전이 이론이라면 명상은 실천이니까요.”
 
미얀마사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예불이 끝나면 꼭 위빠사나 명상에 들어간다. 이런 명상이 한국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내고 온전히 자기를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일까, 사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순박한 눈을 가졌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던가, 그 말을 이곳에서는 무척 실감하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워낙 높은 터라,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이 적지 않을 듯 싶었다. 위 세이따 스님에 의하면 실제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건 이 사원의 설립 목적이 위빠사나 수행 전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의 스님들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위빠사나를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위빠사나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사원을 소개해주는 역할만 하고 있다.
 
“위빠사나는 내 몸과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면서 나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수행법이에요. 이 수행을 통해 분명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미얀마불교를 가장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죠. 기본적으로는 한국불교의 간화선과 미얀마의 위빠사나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간화선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과정의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불교수행에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쯤 위빠사나 수행도 해보시길 권합니다.”
 
 
| “한국불교와 미얀마불교, 우리는 모두 부처님의 제자”
말수가 적은 우 두라 스님은 한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한국어가 아직 많이 서툴다고 했다. 반면 위 세이따 스님은 유창한 한국어를 자랑했다. 이미 한국에서 생활한 지 15년이 넘었다고 한다. 한국불교가 아직은 낯선 미얀마스님과 어느 정도 익숙한 미얀마스님, 그들에게 한국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한국불교는 미얀마불교와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느껴져요. 아무래도 테라바다(상좌부)와 마하야나(대승)의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차피 한국불교와 미얀마불교가 지향하는 목적지는 똑같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다를 뿐이죠. 한국불교와 미얀마불교가 비록 조금은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결국 모두 부처님의 제자잖아요. 당연한 얘기겠지요.”
 
두 스님은 뒤이어 미얀마불교와 한국불교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미얀마에는 민족도 많고 종파도 많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종파라는 개념이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온 두 스님의 눈에 한국불교는 많이 독특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종파에 따라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부터 차이가 많았다. 우 두라 스님은 “한국불교는 종파에 따라 하나의 불교가 아니라 각기 다른 종교처럼 보였다. 어떻게 봐도 같은 불교라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 부분들이 참 재밌었다.”라고 말했다.
 
미얀마사원을 운영해가면서 무엇보다 어려운 부분은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다. 미얀마 노동자들이 어렵게 번 돈을 보시받아 운영한다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더구나 얼마 되지 않는 예산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역할도 해야 한다. 고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도 지금까지 불제자라는 자긍심과 미얀마 동포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서원으로 15년을 버티며 이만큼 여법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마음을 다 하면 길이 있으리라 믿는다고 두 스님은 말했다. 스님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한국에 온 미얀마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안전하고 행복하게 지내다 뜻한 바를 이루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는 것. 그런 발원을 품은 스님들은 오늘도 부처님 전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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