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처님은 왜 돈을 많이 벌라고 했을까?

돈을 바라보는 불자의 올바른 태도

2015-08-02     윤성식

특집 :  가난과 부,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가?

빈자일등, 무소유 등의 단어는 불교와 가난을 공통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히려 생산 활동에 힘쓰라 했고, 재화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경전에서도 재물의 공덕을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는 괴로움보다 가난의 괴로움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금색왕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법을 괴로움이라고 하느냐? 이른바 빈궁이 이것이요.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거운가? 이른바 빈궁의 괴로움이라.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괴로움이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나니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리.”

지금은 돈이 종교인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도 돈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돈은 종교뿐 아니라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불교인의 마음과 생활양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불자는 어떻게 재물을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찾고자 이번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 편집자 주

부와 가난을 보는 붓다의 눈 / 마성스님
부처님은 왜 돈을 많이 벌라고 했을까?  / 윤성식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힘 / 김성동
돈에 대한 새로운 태도, 자발적 가난 / 조혜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회학자로 평가 받는 막스 베버(1864~1920)는 불교에 관한 연구를 했고 불교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막스 베버의 글을 읽어보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대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불교교리를 오해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교를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종교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부질없다, 소용없다.” 하며 극단적 허무주의의 종교로 보고 있다. 주변에 “모든 것이 다 소용없다.”고 한탄하는 부정적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있거나 만사를 무조건 “귀찮다.”고 포기하는 게으른 사람을 보면 기가 막히게도 불교적이라고 이름 붙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무소유에 대한 두 가지 이해

불교는 수많은 경전 속에 각기 다른 모습의 불교교리를 담고 있어서 자칫 일부분만 접하다보면 불교에 대해 오해하기 십상이다. 천재적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불교를 정말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 현대 철학자들 중에는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전히 지식인이나 보통 사람 중에 불교를 허무주의적이고 소극적이고, 심지어 삶과 현실에 대해 부정적인 관점을 가진 ‘염세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불교를 허무적이고 소극적이고 염세적인 종교로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돈에 관한 불교의 관점도 허무적이고 소극적이고 염세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돈도 부귀도 모두 부질없는 거야. 죽으면 다 소용 없어. 그러니 돈 벌려고 열심히 노력할 필요도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우리는 불교적인 사람으로 간주한다. 법정 스님의 베스트셀러 책 『무소유』를 떠올리게 되면 우리의 불교에 대한 오해는 더욱 강화된다.


불교경전에서는 무소유를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는데 첫째 집착이 없는 상태로 본다. 『광찬경光讚經』에서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얻을 수 없으니….”라고 무소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집착만 없다면 괜히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남에게 주어버릴 필요가 없다. 이것이 무소유다. 둘째 생존에 필요한 최소의 것을 소유하는 의미이다. 『불설대견고바라문연기경佛說大堅固婆羅門緣起經』에는 무소유를 “세 벌의 옷과 발우 하나를 지닐 뿐 나머지는 가지지 아니 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법정 스님은 책 『무소유』에서 새로운 물건이 생기니 여러 가지 신경 쓰게 되고,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고 나서야 마음이 편해졌다고 쓰고 있어 두 번째 무소유의 정의에 가까운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불교는 소욕지족小欲知足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물건만을 소유하면서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 의미가 있지만, 무소유를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집착하는 마음만 없다면 돈이 많아도 분명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 번째 무소유의 개념도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집착의 마음만 없으면 돈이 많아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집착의 마음이 없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무소유 개념이 모두 의미가 있는 것이다.

 


| 돈을 왜 많이 벌어야 할까?
불교는 돈이 고통을 주는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돈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이다. 만약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즐거워하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돈에 의해 고통 받지 않는다. 돈이 들어온다면 ‘수많은 인因과 연緣에 따라 돈이 들어오는구나.’라고 담담히 돈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된다. 돈이 나가면 ‘수많은 인과 연에 따라 돈이 사라지는구나.’라고 담담히 돈이 나가는 것을 보면 된다. 돈이 들어오는 것에 즐거운 감정을 보태고, 돈이 나가는 것에 슬픈 감정을 보태는 순간, 우리는 고통의 나락에 빠지는 것이다. 따라서 돈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돈을 바라보는 시각, 돈으로부터 받는 느낌, 돈에 대한 반응이 문제일 뿐이다.


돈이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면 돈은 많을수록 좋다. 돈은 우리를 생존하게 하고 안락을 주고 무엇보다도 복받는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준다. 『증일아함경』에는 “재물을 현재에 가지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게다가 돈이 많으면 우리는 남을 도울 수도 있고 복 짓는 삶도 가능하다.


부처님을 ‘논리의 화신’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따르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여 타당하면 따르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나 논리적인가? ‘돈이 많으면 한량없는 복을 얻는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논리적인 주장이 아닌가? 부처님의 말씀을 떠나서 스스로 곰곰 생각해봐도 참으로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불교는 도시에서 포교를 시작했고 당시에 새롭게 등장한 신흥상공업자들이 대거 불교를 신봉하게 된다. 상인들의 상업활동은 불교의 포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상인들의 활동범위에 따라 불교도 교세를 확장해갔다. 이런 이유로 불교를 ‘상업불교Mercantile Buddh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만약 상공업자들에게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경제원칙을 적용했더라면 경제활동이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상공업자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농업에 종사하는 재가자에게 출가자가 따라야 할 돈에 관한 엄격한 계율을 적용했다면 농업조차 영위하기 힘들었으리라.


불교는 재가자와 출가자에게 각각 다른 경제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출가자는 돈을 만져서도 안 되고 돈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으면 안 된다. 경전은 반대로 재가자에게는 적극적으로 돈을 벌라고 권하고 있다. 물론 불교는 ‘바른 방법’에 의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돈을 벌라고 했지만, 올바르지 않는 방법은 금하고 있다.


올바른 방법이란 첫째 윤리적으로 옳은 방법을 말한다. 남을 속이거나 빼앗는 행위는 당연히 금하고 있다. 둘째 부지런해야 한다. 경전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당연히 재산을 많이 모을 수밖에 없음을 설하고 있다. 부처님은 『별역잡아함경』에서 “벌이 온갖 꽃을 채집하듯이 밤낮으로 재물을 얻으라.”고 설하고 있다.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표현은 경전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어 부처님이 유난히 강조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불교를 허무주의적이고 소극적이며 염세적으로 보는 사람은 경전에 나타난 “열심히 돈을 많이 벌라.”는 표현에 당황할 것이다. 불교는 고통의 원인을 집착으로 보고 집착하는 마음을 허무하다고 본 것이지 물건이나 재물 자체를 허무하다고 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재물에 대한 집착이 많을 수 있고, 아무리 부자여도 재물에 대한 집착을 떠날 수 있다. 재물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집착과 욕망의 가속화가 문제이다. 재물, 명예,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에 집착하고 고통을 느끼는 우리가 문제인 것이다.

 

비록 부처는 돈을 많이 벌라고 했지만, 결코 돈을 최고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돈을 많이 벌라고 했지만, 돈이 전부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복 받는 삶을 위해선 돈이 많을수록 좋다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신 것뿐이다. 돈이 많아서 누리는 복이란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참된 행복은 아니다.


경전에는 돈이 많은 부자가 모든 재산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례를 거론하면서 칭송하고 있다. 심지어 권력을 가진 왕조차도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는 사례도 경전에 나오고 있다. 돈이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고 최고도 아닌 것이다. 다만 깨달음의 길을 가기 위해선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돈보다 더 중요하고 돈이 미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영역이 있음을 알고 돈만 추구하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것이다.


돈은 분명 좋은 것이지만, 우리가 집착의 마음이 있으면 돈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기 때문에 깨달음의 길을 가면서 집착을 떠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돈을 열심히 벌면서 끊임없이 집착을 떠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자의 삶이요 수행자의 삶이다. 이런 삶이야말로 불교가 그토록 추구하는 중도적 삶의 또 하나의 모습이 아닐까?

 


윤성식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으며 미국 공인회계사이다. 이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고려대학교에서 10년 연속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인생 멘토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장으로 디지털 예산 회계시스템 구축과 공직인사제도 등 정부혁신을 주도했다. 지은 책으로는 『불교자본주의』, 『정부회계학』, 『재무행정학』, 『정부개혁의 비전과 전략』, 『공공재무관리』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