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송광사 전 율학승가대학원장 도일 스님 인터뷰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힘

2015-08-02     김성동

특집 :  가난과 부,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가?

빈자일등, 무소유 등의 단어는 불교와 가난을 공통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전달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오히려 생산 활동에 힘쓰라 했고, 재화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경전에서도 재물의 공덕을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죽는 괴로움보다 가난의 괴로움이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금색왕경』에서는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떤 법을 괴로움이라고 하느냐? 이른바 빈궁이 이것이요.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거운가? 이른바 빈궁의 괴로움이라.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괴로움이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나니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 않는 것이 마땅하리.”

지금은 돈이 종교인 시대입니다. 모든 종교도 돈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돈은 종교뿐 아니라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대하는 불교인의 마음과 생활양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돈이 주인이 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불자는 어떻게 재물을 대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을 찾고자 이번 특집을 마련했습니다. - 편집자 주

부와 가난을 보는 붓다의 눈 / 마성스님
부처님은 왜 돈을 많이 벌라고 했을까?  / 윤성식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힘 / 김성동
돈에 대한 새로운 태도, 자발적 가난 / 조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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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 스님을 만났다.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장을 오랫동안 맡았다. 세속으로 보면 판검사를 배출하는 곳의 최고 책임자다. “지금은 모든 일을 놓았다.”라고 옅게 웃었다. 5년 전인가,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 비니원毘尼院 앞마당에서 보았던 웃음 그대로다. 스님은 늘 작게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대하는 품성이 그 속에 있다. 계戒과 율律은 불교의 맨 앞에 놓인다. 나침판이며, 첫 발자국이다. 비니원에서 본 작은 체구와 마른 몸은 불교의 최전선에 있는 전사의 모습 같았다. 지금은 그 최전선에서 벗어나 보림保任 중이다. 5년 전 모습보다 건강해보였다. 몸을 쉬고 있다고 했다. 이번 특집 주제를 위해 스님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율사律師이면서 최근 현대 불교생활백서인 『불자로 산다는 것』을 펴내 불자들이 ‘가난과 부’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위해 거주 사찰을 묻자, “이 나이 들도록 절이 없다.”고 머쓱해 하며, 마침 서울 송광사 서울포교당 법련사에 올라온다고 했다. 인터뷰는 서울 법련사에서 진행됐다.  - 편집자 주
 
 
 
 보통 불자들은 불교를 빈자일등, 무소유 등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생산 활동에 힘쓰라고 하셨고, 또 탐욕을 경계하면서도 재물 모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한편으로 재물이 없는 것도 고통입니다. 가난은 부처님께서도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자들은 재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요? 
 
도일 스님 부처님께서는 왕자로 재물이 풍족한 상태에서 출가하셨기 때문에 재물을 지속적으로 축적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셨습니다. 출가 이후에도 탁발하는 삶을 살았는데, 당시 인도 사회에 수행자는 누구나 그러했습니다.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형편들이 다들 비슷하니, 부자와 가난한 자를 크게 나누는 모습은 없었어요. 우리나라도 60~70년대에도 다들 그냥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80년대부터 극명하게 빈부차이가 생겨나면서 부에 대한 욕망이 생겨났죠.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잘 살지만, 다른 부자와 비교하니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 면에서 빈곤감은 상대적인 것이 아닐까 싶어요. 
 
가난의 문제는 국가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북유럽의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50%의 세금을 냅니다. 부가 분배되는 것이고, 이는 사회적 시스템이죠. 가난은 그렇게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가난의 개인적 문제 속에는 마음의 빈곤함이 함께 있습니다. 물질이 부족해서 가난하다는 문제는 본질적이지는 않습니다.
 
불광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인데, 이를 단순히 욕망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도일 스님 필요 이상으로 돈을 추구하면 문제겠죠. 내 능력 밖의 재물을 원하면 그것은 고통이 되죠. 그것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이 많으면 좋은가? 좋고 나쁜 것이 함께 있어요. 행복의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중요하죠. 내가 갖고 있는 능력 이상으로 욕망을 추구하게 되면 고통이 따릅니다.
 
불광 세속에서는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욕구입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신 필요 이상의 돈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욕망을 확장하는 것이 보통의 심리인데요. 
 
도일 스님 생활의 여유를 가지는 정도로 재물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바빴다는 것이죠. 말씀하신 것처럼 여유로운 삶은 자의적입니다. 가령 일류 호텔에 출입을 자주 하기 위해 부를 축적하고, 이 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뒤따르게 됩니다. 번뇌도 뒤따르죠. 이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불자들은 부와 가난을 바라볼 때 불자라는 베이직basic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잣대로 이야기하면 (대화가)어렵습니다. 분명히 불자라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범주에서 이야기해야죠.
 
불광 그러면 부를 추구하려는 불자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까요?
 
도일 스님 불자들이 스스로를 무소유나 빈자일등의 카테고리에 잡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무소유는 출가 수행자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방식이죠. 일반 불자들에게는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자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부를 일으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무소유를 불자들에게 “이것이 불교정신이야!” 하고 강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의무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당함이 있어야 하죠.
 
불광 여기서 정당함이란 어떤 것이죠?
 
도일 스님 불자들이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오계五戒의 범위에서 얻은 재물은 상당한 가치가 있습니다.
 
불광 정당하게 부를 축적했다면 이후 어떻게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요?
 
도일 스님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보시가 중요합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도 사섭법四攝法도 그렇죠. 사회적 부富를 쌓은 사람들이 사회적 환원을 할 경우 행복을 느낍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훈련되거나, 어느 순간 변화된 삶을 살게 될 때 가능하죠. 부처님께서는 재물을 얻었을 때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저축하고, 집안을 돌보고, 보시하고, 재투자 하는 것인데요. 지금 상황과 비교할 때도 비슷합니다. 특히 보시행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모두 행해야 합니다.
 
불광 열심히 일하지만,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불교는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도일 스님 그것은 불교가 직접 풀어갈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인 문제죠. 사람들이 가난한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 게을러서 가난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말씀하신 것, 열심히 일했는데 가난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혼자서 많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 등 다양하죠. 그런데 정말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적, 국가적 문제죠. 이것은 사회가 해결해야 합니다.
 
불광 그들에게 불교는 어떤 직접적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인가요?
 
도일 스님 불교적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살고, 원망하고 비교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접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불교가 주는 해답은 아닙니다. 사회적 문제죠. 물론 업의 문제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과거의 업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 그런 것일 뿐이죠. 가난한 이유가 전생에 가난한 업을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숙명론이 아닙니다. 힌두교적인 발상입니다. 업은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현재진행형이죠. 현재의 업이 바뀌면 과거의 업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재를 잘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얽매이면 노예가 됩니다.
 
 
스님은 자리에 앉아 푸른색 손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두 손에 쥐고, 미동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음에 대한 주제를 항상 고민하고 있지 않으면 즉답이 나오기 어렵다. 스님은 질문하면 바로 답변했다. 율사이기에 늘 ‘계와 율’ 그리고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이라는 프리즘으로 현상을 본다. 막힘없고, 명료하며, 냉철하다. 스님은 “내 이야기가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고 했다. 위로가 답이 아니기에 위로를 말하지 않는다. 
 
 
불광 현재 삶을 긍정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희망적이지만, 현실은(가난한 이들에게) 여전히 불안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일 스님 결국은 나라 자체가 북유럽처럼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국가 시스템이 변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까 말씀드린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불교가 옆에서 조력해야죠.
 
불광 그런 국가 시스템 변화에 불교는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는 것인가요?
 
도일 스님 아닙니다. 오히려 역할을 해야죠. 거기서 불교가 역할이 큽니다. 예를 들면 북유럽 국가는 불교를 표방하지 않지만, 사회적 시스템이 불교적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공공재 역할이 큰 것이 그렇죠. 그런 점에서 불교는 우리나라가 공공적인 요소가 발전될 수 있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불광 그렇다면 우리 불교계는 불교 내부의 문제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전체 시스템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인가요?
 
도일 스님 반드시 필요하죠. 그것이 보살도입니다. 보살도를 중심으로 문제를 생각해야죠.
 
불광 최근 우리 사회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대출금, 아르바이트, 비정규직으로 힘들어 합니다. 불교청년들도 법회에 나오는 청년들이 많이 줄었습니다. 원인 중에 하나가 먹고 사느라 너무 바쁘고 지쳐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하죠?
 
도일 스님 지금은 스님들이 메시지를 못주고 있어요. 스님들이 절박함이 없어요. 현재는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또 대학생이나 청년들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불교를 왜 믿느냐고 물으면 자기 자신을 위해 믿는 것입니다. 절에 가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영화도 내가 좋아서 보듯이, 내가 좋아서 절에 가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절에 가지 않는다는 것은 불교를 깊이 좋아하지 않았고, 스스로 깊이 들어가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찾는 종교입니다. 누가 내 입에 떠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떠먹는 것입니다. 계를 받을 때도 스님들이 계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를 맹세하는 것이거든요. 내가 지키겠다는 것이죠. 내 스스로가 나에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불광 불교는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웃종교는 위로를 많이 해주는데요. 
 
도일 스님 단순한 위로는 마약이죠. 괜찮아, 하는 말을 자꾸 한다면, 본질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불광 그럼 불교는 위로의 종교가 아닌가요?
 
도일 스님 불교는 위로의 종교가 아닙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게 하는 종교죠.
 
불광 그러면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대중들은 위로를 받고자 하는 속성이 있지 않습니까? 
 
도일 스님 물론 불교도 관세음보살 같은 따뜻한 모성애가 있죠. 그런데 본질적으로는 여실지견,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냉정할 수도 있겠죠. 바른 이야기를 해주고, 바른 길을 가게 해야 합니다. 어려운 분들에게는 현실을 정확하게 직시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물론, 당장은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좋겠지만, 미래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딛고 일어나라고 합니다. 차가운 땅에 의지하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냉정하지만. 저는 어려운 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불교적인 위로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부처님 곁에 있었다면, 저는 이런 방식이 좋겠다고 부처님께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불광 불교는 가난한 이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요? 
 
도일 스님 불교적으로 본다면 가난을 이기는 방법은 우선 나와 세상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 눈이 생기면, 자기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겠다는 힘이 생깁니다. 냉정한 눈이죠. 그렇게 사물의 진실을 꿰뚫는 힘을 추사 김정희는 금강안金剛眼이라고 했습니다. 사물을 잘 성찰하고, 자신을 닦아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로는 인내력이죠. 어떤 일이라도 깊이 들어가면 그 결과는 놀랍도록 달라집니다. 그것을 경험할 수 있도록 꾸준하게 자신을 밀고 가는 것이 필요하죠. 셋째로는 자기 자신을 믿고 태산같은 자부심을 가져주신다면 좋겠습니다.
 
 
 
도일 스님
1973년 양산 미타암으로 입산했다. 이후 통도사에서 월파 스님을 은사,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와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태국 왕립 마하출라롱콘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런던대학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대강백 각성 스님께 전강을 받고,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께 전계를 받았으며, 통도사 율주 혜남 스님께 자장율맥을 전수받았다. 2007년부터 2015년 동안거까지 조계총림 송광사 율학승가대학원 원장을 지냈다. 현재 통도사 취운선원, 부산 보광사 등에서 운수납자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불자로 산다는 것』(불광출판사)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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