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나는 불자입니다 : 전북대 예술학과 교수 이준모

춤은 수행이다

2017-02-08     정태겸

[특집] 나는 불자입니다.

불자佛子. ‘부처님의 제자’, ‘보살을 달리 이르는 말’, ‘계를 받아 출가한 사람’, ‘불교 신자’, ‘부처님의 아들ㆍ딸’. 모두 불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불자로서 자존감을 가지고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을 실천하는 이들을 만났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중심축으로 삼아 자기 삶을 현명하게 이끌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불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빛나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나는 불자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이들의 이야기. 들어봅시다. 그리고 묻습니다. 당신은 불자입니까?

01  ‘불자’라는 상相을 내어 의료봉사를 실천하다 : 국립정신건강센터 양동선 치과과장 / 조혜영
02  춤은 수행이다 : 전북대 예술학과 이준모 교수 / 정태겸
03  향기로운 범음,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 했소 : 명상음악가 홍관수 / 유윤정
04  지장보살의 큰 원처럼 사는 불자 : 여주교도소 어윤식 교도관 / 유윤정
05  불교가 있어 내가 있었다 : 개그맨 양상국  / 정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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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예술학과 교수 이준모
 
춤은 수행이다
 
그의 이름은 이화석이다. 지난해까지는 그랬다. 지금 그의 이름은 이준모다. 지난해 개명했다. 준, 주다, give의 의미다. 모, more, ‘더욱’이라는 의미다. 둘을 합하면 더 많이 준다는 의미가 된다. 관객에게 더 많은 것을 전달해서 그들과 소통하고 싶었던 그가 직접 지은 이름이었다. 그는 관객에게 몸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소통의 몸짓’에 갈증을 느끼는 춤꾼이었다.
 
| 몸짓으로 불교의 세계를 말하다
이름을 바꾼 이유를 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난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아버지께서 주신 이름으로, 그 이름에 담아주신 뜻을 따라가며 살아왔어요.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남은 인생은 온전히 나의 인생으로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야겠구나. 그래서 바꾸기로 했죠.”
 
무용가 이준모. 그는 전북대 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교 내에서 그가 맡은 전공은 ‘컨템포러리 재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전공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사실 현대무용에서 그런 식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형식과 틀을 파괴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빚어진 몸짓이 현대무용이다. 그것을 다시 장르를 나눠 구분한다는 것은 도리어 의미를 역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런 구분은 의미가 없다. 그는 컨템포러리 재즈를 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춤을 출 뿐이다.
 
무용가인 그를 찾아간 것은, 불교를 소재로 한 몸짓을 무대에서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르로 세분화되는 형식은 의미가 없지만, 주제는 의미가 크다. 그는 2013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에서 김기인 무용예술상을 수상했다. 당시 그의 작품의 이름은 ‘one hundred and eight(108)’이었다. 그게 그가 ‘불교’에서 받은 영감을 무대 위에서 보여준 첫 번째 작품이었다. 2015년에는 제1회 불교무용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당시 그가 상연한 작품 제목은 ‘다비’였다. 많은 호평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그의 작품 ‘다비’는 생-노-병-사의 일반적인 순환고리를 따라가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에서 시작해 윤회를 벗어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윤회는 순환의 고리다. 그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 자신의 모든 업장을 지수화풍에 내주었을 때 업이 소멸되고 온전히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다비 의식에 담긴 이런 철학을 그는 춤으로 구현했다. 이글거리는 불길을 의미하는 손끝의 움직임은 바람에 흩어지는 몸짓으로 이어지며 비로소 자유로운 적멸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가 새로 준비하고 있는 무대 역시 불교 소재를 모티브로 구성 중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따스한 위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만드는 무대다. 앞으로도 그는 불교를 모티브로 한 무용을 계속 만들어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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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
불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선보이면서 그는 외국인 평론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다. 자연스레 해외에서 그의 춤에 러브콜을 보냈다. 그는 그때마다 우리가 ‘불교무용’이라고 부르는 작품을 해외 무대에 올렸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다. 무용가의 춤은 생각보다 많은 관객을 만나기 어렵다. 현대무용의 특징상 무대를 찾아오는 관객도 많지 않고, 공연기간도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장르들에 비하면 매우 짧다. 해외의 무대에서 자신의 몸짓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건, 그래서 기쁨이다.
 
“한국적인 것을 찾고 있었어요. 어떻게 하면 한국적인 것을 춤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저에겐 그 결과가 불교였어요.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 있던 게 불교였고, 머리가 굵어지면서는 굳이 불교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지만 결국 내 속에 내재돼 있던 ‘불교’라는 씨앗이 때가 되어 싹을 틔운 거죠. 아주 자연스럽게 불교에서 느끼고 얻어왔던 것들이 춤으로 나왔어요.”
 
그의 아버지는 대단한 불자였다. 스님이 되고 싶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품은 뜻을 펼치지 못한 응어리는 숨겨 놓아도 튀어나오는 송곳의 끝과 같다. 어디론가는 그 응어리를 흘려보내기 마련이다. 그의 아버지는 4남 2녀의 형제들이 어릴 때부터 불교의 세계를 주입했다. 용돈을 주기 전에는 늘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을 외우도록 시켰다. 그 덕에 이 교수는 어릴 적부터 경전을 달달 외웠다. 교회에 갔다가는 맞아죽을 줄 알아라, 아버지가 늘 서슬 퍼렇게 엄포를 두던 말이었다. 사탕을 먹으러 교회에 가보고 싶었지만, 그 서슬 퍼런 엄포가 두려워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고 이준모 교수는 털어놨다.
 
결국 누님이 스님이 됐다. 그 덕에 지금도 이 교수는 누님이 계신 절을 찾아다니며 불교와의 연을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늘 가까이에 존재하는 불교는 어린 시절 그에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재미없고, 고루했다. 굳이 그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반면에 이 교수가 무용을 택했을 때,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남자가 무용을 하면 손가락질을 받던 19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남자가 몸에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고, 우아한 몸짓으로 나래를 펼치는 게 그리 보기 좋은 모습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사회였다. 늘 짜여진 틀 속에서 옴짝달싹 못할 만큼 보수적인 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다. 역설적이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응어리는 아들이 가고 싶어 하는 그 길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탈출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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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는 날까지 춤추리라
그의 성격은 워낙 낙천적이다. 부정적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남들이 쳐다보고 입을 가리며 흠을 잡아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의 날개를 달고 날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재밌는 것은 그가 한 번도 무용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는 사실이다.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무용학원 간판을 보고 그냥 들어갔어요. 저는 남들에게 주목받는 걸 좋아해요. 무언가 남들과 다른 걸 하고 싶었던 거죠.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걸 하고 싶었어요. 무대 위에 올라가면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했지만, 전 좋았어요. 그것도 나름의 주목을 끄는 거였으니까요.”
 
춤은 성취감이 강하다. 한 가지 테크닉을 익힐 때마다 이루 말하기 어려운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콩쿠르에 나가서 상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쟁을 이겨내고 당당하게 고지에 올라선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쾌감은 마약과도 같다. 그는 돌고, 뛰고, 날아오르며 춤을 췄다. 지금 그는 현대무용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본래는 발레리노였다. 중학교 때 처음 시작한 발레로 그는 대학을 갔고, 국립발레단의 일원이 됐으며, 유니버셜 발레단의 미래로 주목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잘 닦여진 길보다는 거친 초원을 달리고 구르는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발레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무용이에요. 그런데 전 표현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거든요. 고정적인 관념과 규칙 안에서 나를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너무 뚜렷했어요. 그래서 현대무용 쪽으로 방향을 바꾼 거죠. 그 뒤로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은 거의 다 해본 것 같아요. 저에게 소원이 있다면 죽는 날까지 춤을 추는 거예요. 춤꾼에게 춤은 수행이에요. 평생을 춤꾼으로 살았다면 늙어 죽는 날까지 춤을 출 수 있어야죠. 그래서 늘 몸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이 숙제예요. 사실 국내에는 50대 이상 무용수가 흔치 않거든요. 춤을 출 수 있는 몸을 유지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요. 춤꾼에게 춤은 두타행이나 마찬가지죠.”
 
인터뷰를 마치고 연습실에 들어선 그는 네 발로 걸어 다니며 몸을 풀었다. 호보법虎步法이라 불리는 걸음걸이다. 그는 늘 그렇게 몸을 푼다. 이윽고 그가 새로운 무대에 올릴 몸짓을 시작했다. 그는 차가운 연습실 바닥에 앉아 천천히 다리를 뻗어 허공을 걸었다. 춤꾼의 몸은 유연했고 허공을 걷는 걸음걸이는 아름다웠다. 문득 창 너머 햇살이 쏟아질 때면, 마치 세상을 향해 나가고 싶었던 자궁 속 아이처럼 그의 몸이 천천히 꿈틀댔다. 순수의 몸짓이다. 창밖에는 허공을 걷는 그의 발걸음처럼 함박눈이 펄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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