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불자의 재목으로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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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불자의 재목으로 서겠습니다.
  • 관리자
  • 승인 2007.10.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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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믿음 나의 다짐

속리산 법주사 내에서 일을 하시던 외삼촌댁에서 학교를 다니며 법주사를 내 집 삼아서, 속리산을 놀이터 삼아서 자란 내게 불교의 의미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절이란 곳은 부처님이 계시고, 스님들이 계시며, 뭔가 소원을 빌면 이루는 곳인가보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새총을 만들어 경내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못살게 구는 놀이에 빠졌던 철부지 시절이었습니다.

법주사 원주스님께서 제가 불연이 깊음을 아셨는지 “창우야! 내 행자하련?” 하셨지만 전 기겁을 하며 도망치곤 했습니다.

법주사에 있으면서 불교의 바른 교리와 수행법을 익혔다면 그간 청년기에 겪었던 모든 어려움을 의연히 극복했으련만 그러지 못했음을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가정형편으로 다 못한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한 아이의 아빠일 때 대학 진학을 한 제가 다시 부처님을 만난 것은 원주 구법당인 법웅사에서 가졌던 청년법회에서였습니다.

그때 법사님이셨던 박지봉(현재 원주불교대학 사무처장) 거사님께서 청년불자에게 대각사에서 펴낸 「불광요전」을 나눠주시며 법등활동과 일과정진 수행방법 등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은 책꽂이 한 켠에서 먼지가 쌓인 채 꽂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학도의 아내로서 정신적 물질적 갈등을 겪던 아내가 건강을 잃고 대수술을 받는 어려움 속에서 「불광요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법등일송을 읽고 가슴을 꽉 채웠던 원망덩어리가 풀리더라며 「불광요전」을 밤낮으로 들고 지냈지만 서울의 대각사를 찾아올 엄두를 내진 못했습니다.

불자가 아니었던 아내는 겨우 삼배만 할 정도였는데 불광요전을 대하며 불교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 수술 후의 후유증도 극복할 겸 다섯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백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원주 영천사를 다녔습니다. 오히려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돈독해져 저를 이끌어주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제 어머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아내가 대신 절에 다니며 가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저는 제 가슴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으면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 속에서 빠져나오질 못했습니다.

청년법회에서 배운 교리는 제게 지식으로만 자리잡고 있었나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직에 대한 불안에 빠져서 헤매자 아내가 산신각 개축 불사기도에 동참하라기에 새벽에 혼자서 원주 영천사를 찾았습니다. 좁은 산신각이라 보살님들 뒤에서 절을 하려면 보살님들 엉덩이에 부딪쳐 마음이 편하질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자라곤 저 혼자이니 영 쑥스러워서 하루 가고 그만두겠다고 하자 만삭이던 아내가 함께 새벽마다 나서주어 무사히 칠일기도를 마쳤으나 제가 간절히 원하던 교직자리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내 소원을 안 들어 주셨다는 생각에 원망을 하면서 그 후 절을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밝은 미래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첫 발을 디딘 곳이 제약회사 영업부였고, 맨 손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저같이 고지식한 성격인 사람에겐 많은 경제적 정신적 고통이 함께 찾아왔습니다. 회사동료들과 어울리면서도 뭔지 모를 이질감에 대낮에도 어두운 밤길을 헤매는 듯한 날들이었습니다.

내 방황에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절들을 찾아다녔지만 제 마음에는 안닿았고 그러던 어느 날 쌀가게에 ‘마하반야바라밀’이 쓰인 장식꽃과 달력을 보고 불광법회에 대해 묻자 가게주인이셨던 면목법등 자순 보살님께서 대각사에서 잠실 불광사를 지어 옮겼다며 안내해 주겠다고 해서 함께 불광사를 기쁜 마음으로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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