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미술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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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미술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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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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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미술의 역사3

불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부족 국가가 봉건 군주국으로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탄생하여 세계의 종교로 발전해 갔다.

원시경전에 의하면 석존 당시 북인도에서는 16대국이 있었고, 이를 다시 군주국과 공화국으로 대별할 수 있으며 왕국이 공화국으로 병합되고 왕국은 더욱 강한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석가족의 카필라(Kapila)국도 코살라(Kosala) 국에서 멸망당하는 모습이 불전 속에 전한다. 코살라국은 마가다국에 병합되었다. 이때 마케도니아 알랙산더 왕은 페르샤를 정복하고 계속 북부인도 공략에 나서지만(BC327~325) 인도제국의 저항으로 판잡(Panjab) 지방에서 희랍군은 저지당하고 회군하였다. 거기에서 위성국가(식민지)가 세워지고 있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희랍으로 돌아가던 알랙산더왕은 도중 객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으로 인도인의 외세 배척의식은 고조되고, 자주정신의 고양으로 통일국가 경영에 나선다. BC317년 마가다국에서 찬드라굽타(Candragupta:BC321~299재위)가 마우리아(Maurya)왕조를 일으키면서 인도의 중북부 지역을 통일하였다. 제3대왕으로 즉위한 아쇼카(AsokaBC264~217재위)왕은 통일 국가 위엄을 계승하여 남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통일 대제국의 정치는 법(Dharma)에 의한 통치를 했는데, 이 시대 만들어진 아쇼카의 기념주(Asokas pillars)가 불교미술의 서장을 연다는 사실을 지난 호에서 지적하였다.

아쇼카왕의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40여년이 지난 BC180년경에 붕괴한다. 그 후 인도에선 여러 민족과 부족 그리고 서로 다른 종교를 신봉하는 각 정치세력이 각축을 벌리면서 혼미의 늪으로 빠지고, 이민족-박트리아. 샤카족의 침입을 당한다. 여기에 이질적인 여러 문화가 뒤섞이면서, 복잡한 문화적 변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는 인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간다. 이 시대 희랍인 왕 메난드로스(Menandros)와 당대 불교학승 나아가세나(Nagasena)장로 사이의 대화는 밀린다팡하(Milindpancha:밀란다왕문경)로 현존하는데 동서의 종교적 철학적 만남을 잘 표현 해주고 있다. (매난드로스가 이를 계기로 불교에 귀의하고 있음을 시알코트의 고탑에서 출토된 불사리함의 명문이 밝혀주고 잇다.)

당시에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마우리아왕조의 통일된 행정. 내륙지방의 도로망 정비로 상호교류가 빈번해졌기 때문이고, 여기에 이민족의 침입도 도로망 정비 및 확장과 경제문화 교류에 한 몫을 더했다. 불교는 이러한 사회적 격동기에 인도 전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가 지역에는 불교센터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에는 중앙집권적 조직력에 의한 전법이아니라 각 지역 불교센터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인도 불교교단은 중앙집권적 승가조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는 이미 승원생활이 정착했었는데, 정사를 세우고 불탑을 봉납하고 차이터(Cpitya)가 건립이 되었으며 승원기구도 확립 되었다. 비구들은 승원 내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고(탁발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의복도 분소의(糞掃依)는 사용하지 않고 삼의(三衣 :大衣 中衣, 下衣)가 제정 되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왕가나 상공업자의 토지 기증으로 승원의 경제적 풍요뿐만이 아니라 세속 고용인까지 두게 된다. 재가 신자와의 관계에서도 승원은 공덕을 쌓게 해 준다는 명분으로 법보시의 교환이라는 형태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상가와 각 지역 간의 유대강화 뿐만이 아니라 상가의 세속화를 가속 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상가의 경제적인 풍요는 강한 문제의식 없이 다만 의.식.주의 자족을 위한 출가를 조장하여 치열한 구도심 없는 안이한 수행의 길-세속화의 길-로 치닫게 하였다. 수행을 생명 삼아야할 불교의 실천적 성격에서 분석 종합의 논리의 관념적. 사념적 성격으로 전도되면서 학문으로 불교의 발달을 가져왔다. 이는 상가의 퇴영적 경향을 조장하였으며 재가신자의 교화에도 형식적인관계 즉 현세적 이익을 기원하는 식으로 변한다.(그 당시 두타행-무소유, 무일물의 철저한 구도자로 삶을 살아가는 수행자 군은 존재했었지만 전체교단에 비해 소수이었기에 문제가 심각 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의 경향과 침체의 늪에서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려는 운동이 대승불교 운동이다. 이 청신한 기풍, 진작의 조짐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부터 고조 되었다.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법에 대한 자각이다. 법에 대한 객관적 해석, 이론적 분석태도에서 스스로의 체험과 실천을 통한 깨달음의 증득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혜(prajna,프라즈냐 般若)의 강조로 나타나면서 지혜의 구체적 내용은 선정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으로, 분별하는 지식으로 분석하여 인식되어지는 이성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즉 선정을 통한 공(Sunya. 슈나. 空)의 체험실천으로 파악 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의 사조 인 실유(實有)사상을 부정하면서 아(我)의 분별이나 집착을 깨뜨릴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히는 방법으로 공의 실천을 강조 했던 것이다. 이공의 실천은 스스로 불타임을 자각하여, 불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불타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행자를 보살(Bodhi Satlva, 보디삿트바 :菩薩)이라 한다. 보살은 대승에서 설정한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구보리(求菩狸), 화중생(化衆生)을 하는 수행자를 출가. 재가 구별 없이 총칭하는 말이다. 대승에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서원(誓願)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또한 불신(佛身)의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법신(法身), 報身(보신), 응신 화신(應身 化身)불 및 관세음 보현, 문수 ,지장, 세지보살의 등장이다.(三身 및 大勝보살에 대한 설명은 차후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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