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이 함께한 천은사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인 ‘지리산 사람들’ 윤주옥 대표는 필연적으로 국립공원 내 사찰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다. 지금은 사라진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 문제로 사찰 앞에서 시위도 하고 스님들과 거친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2007년 해인사 앞에서 피케팅을 하는데, 해인사 스님들은 각목을 들고 그들을 맞이했다.
“이게 뭐지? ‘해인사 스님들은 왜 이렇게 거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거칠게 나오는 것은 뭔가 절박함이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죠.”
다음에 맞이한 곳이 문제의 천은사. 그즈음 삶의 터전도 구례로 옮겼다. 30번 넘게 지리산을 다니다 보니 남편이 ‘차라리 내려가라’ 했다고. 지리산 인근의 사람들도 “서울에서 빈곤하게 살지 말고 내려와 풍족하게 살아라”며 집도 알아봐줬다. 그렇게 후다닥 내려온 곳이 화엄사와 천은사를 품고 있는 구례다.
처음에는 “왜 도로를 막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돈을 받아? 버스를 세우면서까지 받네?” 생각했죠. 그렇게 만난 사람이 당시 천은사 주지였던 영관 스님이다. 처음 만난 스님은 거칠고 직설적이었다. ‘이거 해볼 만한데?’ 생각했다고.
시민단체의 항의가 계속됐고 지루한 법적 소송도 진행됐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성삼재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된 과정이 세부적으로 밝혀졌다.
“천은사 소유 땅 위에 도로를 놓은 거잖아요? 그런데 도로를 건설하면서 제대로 된 수용 절차도 없었고 보상도 없이 진행된 거죠. 관람료를 받는 것도 문제지만, 천은사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생각했죠. 국가가 잘못한 것이고, 그러면 국가가 해결해야 했죠.”
‘싸우면서 정든다’라는 말이 있는데, 윤주옥 대표와 사찰 간의 관계가 딱 그렇다. 100%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사찰 입장도 이해하고, 대화하고 중재하면서 지리산 사찰들과 작은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저는 사찰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에요. 사찰이 국립공원 안에 있었기에 관심이 간 거죠. 국립공원 밖에 있었으면 눈도 돌리지 않았을 겁니다.”
지리산 옛길을 찾아
처음으로 실시한 프로그램이 ‘나는 쉬고 싶다’. ‘여성들이여,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라’는 주제로 여성 12명만 모집해, 화엄사·천은사·연곡사를 3박 4일 동안 돌았다. 진행한 프로그램은 단 하나. 박두규, 박남준 등 지리산 시인을 번갈아 모셔 ‘죽음’, ‘단순 소박한 삶’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사찰과 많은 갈등이 있었는데, 문을 활짝 열어 줬죠.”
그렇게 10여 년이 흘러 지리산 옛길을 찾겠다는 원을 세운 것이 2023년 초.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과 가볍게 차담할 때, 옛길과 암자 터 이야기를 하니 스님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졌다고.
문헌을 조사하고 답사팀을 꾸렸다. 현장 안내인, 식물조사 2인, 기록 2인, 사진 2인이 함께했다. 답사할 때마다 6~10명이 함께해 10월 말에 완료했다. 옛길은 산동마을에서 천은사, 천은사에서 화엄사, 화엄사에서 문수사, 문수사에서 연곡사까지 이뤄졌다. 사찰과 사찰 사이에는 지리산 능선이 뻗어있고, 능선에는 사찰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개가 있었다.
“길을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은 알더라고요. 약초를 채취하거나 필요에 따라 산을 오르는 사람이 계십니다. 암자 터의 대략적 위치를 말하면 귀신같이 찾더라고요.”
지리산 깊은 곳의 대부분 암자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대부분 파괴됐고, 사람들은 이 길을 걷지 않았다.
“저는 그 길을 스님들이 다니는 길로 알았어요. 그런데 천은사 고개 너머 사포마을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몇십 년 전까지는 마을 사람들이 부처님오신날 전날 그 고갯길을 넘어 천은사로 갔다는 거예요. 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었던 거죠. 그 길을 우리가 걸었습니다.”
옛길은 흔적을 남겼고, 암자 터에서는 자그마한 축대와 기왓장이 있었다. 천은사 길에서 첫 암자 터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면서 벅찬 감격도 맛봤다.
지리산 사람들
답사팀은 길과 암자 터의 위치, 발견된 유물, 식생을 낱낱이 조사해 책으로 올 초 발간했다. 꼭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옛길을 찾아 나서면서 사람들도 만났다.
“화엄사 아랫마을이 황전마을입니다. 그곳에서 보살님을 한 분 만났는데, 그분은 평생을 걸쳐 화엄사 일을 봐주던 노보살님이세요. 품삯을 받으며 절 일을 하고 있었죠.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화엄사 스님 대부분이 오셨다고 해요.
그 후로는 ‘내가 몸이 부서져도 화엄사 일은 죽을 때까지 할 것이다’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절에서 오라 하면 새벽이든, 밤이든 달려갔다고 합니다.”
어느 날은 말을 하지 못해 아내가 입 모양을 보면서 통역을 해준 분을 만났다. 그분이 화엄사 스님이었는데 통역한 아내도 그날 처음 알았다고. 사하촌 사람들 이야기는 마음을 울먹이게도 했다.
윤주옥 대표는 국립공원 지키는 일로 여전히 바쁘다. 벽소령에 도로를 건설하거나,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를 설치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한 달에 몇 번씩은 피켓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지금은 사찰과 너무 가까워졌어요. 나중을 위해서 조금 거리를 두어야 할까 봐요(웃음).”
윤주옥 대표는 공원입장료와 문화재관람료가 폐지되면서 국립공원의 가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장료나 관람료라는 이름은 아니지만, “제 돈을 지불하면서 바라볼 때, 국립공원과 문화재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 이야기한다. 대신 그들에게 지불하는 돈만큼의 가치를 느끼게 해줄 것을 당부한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