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치 삼독의 번뇌와 파멸
탐욕(탐貪), 증오(진瞋), 어리석음(치癡)이라는 번뇌는 인간으로 하여금 살인마저 서슴지 않게 만든다. 부모 형제간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은 항상 그럴듯한 거짓 명분을 내세우지만, 진실은 탐·진·치 삼독(三毒)에 중독됐을 뿐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부와 권력이 마치 신기루와 다를 바 없는데도 인간은 그 허상을 움켜쥐기 위해 아귀다툼하듯 팔을 뻗어 허우적댄다. 그러나 남는 것은 후회와 비탄, 현기증 나는 인과응보의 반복밖에 없음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위제희 왕비 사이에서 자식을 얻기 위해 간절히 애를 쓴다. 빔비사라 왕은 어느 날 한 관상가로부터 “비구리 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선인이 죽으면, 그 선인이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어리석게도 빔비사라 왕은 하루라도 빨리 아들을 얻으려는 마음에 성급하게 그 선인을 살해하고 만다.
빔비사라 왕이 바라던 대로 아들이 태어났지만 기쁨도 잠시, 이내 “이 아들이 전생에 선인이었을 때, 살해를 당한 원한 때문에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섬뜩한 예언을 듣게 된다. 분노와 불안에 휩싸인 빔비사라 왕은 아들을 높은 누각에서 떨어뜨려 숨지게 하려 했지만, 아들은 손가락만 조금 다쳤을 뿐이었다.
이후 그 아들이 장성해서 아사세 태자가 됐는데, 제바달다의 꼬임에 빠져 빔비사라 왕을 일곱 겹으로 둘러싼 별궁에 가두게 된다. 아사세 태자는 아버지 빔비사라 왕을 굶겨 죽일 심산으로 신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음식을 들여보내지 못하게 엄명을 내린다. 왕비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낸다. 왕비는 목욕 후, 꿀에 반죽한 쌀가루를 자신의 몸에 바르고, 장신구 속에 포도주를 담아 빔비사라 왕이 유폐된 처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빔비사라 왕은 연명할 수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아사세 태자는 그 진상을 알아내고, 자신의 어머니도 또한 역적이라며 처단하려 들었다. 이때 월광과 가비라는 대신이 들어와서 읍소하기를 “대왕이시며, 세상의 역사 이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경우는 많았지만, 무도하게 그 어머니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대왕께서 지금 그러한 일을 저지른다면 국가적으로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고, 신들은 차마 그러한 나라에 더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사세 태자는 결국 이 충언에 어쩌지 못해 어머니마저 더 깊은 별궁에 가두어 버리고 출입하지 못하게 한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이 설해지게 된 배경인 이 이야기는 인과는 물론 탐심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자신은 물론 주변을 어느 정도까지 파멸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 인간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시야를 통해, 자식이나 부모조차 가리지 않고 살생을 서슴지 않는 인간 내면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표현한 화가가 있다. 바로 일리야 레핀(Ilya Repin, 1844~1930)이다.
고통 받는 자들의 삶을 응시하다
일리야 레핀은 통상 러시아 사실주의의 대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리야 레핀은 1844년 우크라이나의 추구예프에서 태어난다.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만큼 이 화가의 국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일리야 레핀은 어려서부터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훗날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현 레핀대)에 합격할 정도였다. 레핀은 졸업 작품전에 낸 <야이로 딸의 부활>의 수상으로 유럽 연수까지 할 수 있게 되어 파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일찍 귀국한다.
그는 당시 러시아에 만연한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모순 속에서 고통받고 소외된 노동자들과 빈민들의 참상에 주목한다. 동료들과 이른바 ‘이동전람파(Peredvizhniki)’를 결성해서 함께 러시아 전역을 돌면서 민중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고통받는 자들의 삶을 마치 기록하듯 사실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렇다고 해서 레핀의 작품에 민중들만이 주인공인 것은 아니었다. 같이 교유했던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니콜라이 2세 등과 황족과 귀족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레핀의 초상화에 등장한다.
일리야 레핀은 당대에 이미 인물의 특징을 풍부한 색감으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대가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쿠르스트 현의 십자가 행렬>, <자포로지예의 코사크인들>(1891) 등이 있다. 후에 그 실력을 인정받아 자신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용돼 후학을 양성했으며, 54세 이후에는 핀란드 대공국의 쿠오칼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고, 마지막 임종 시까지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1930년 86세에 이르러 생을 마감한다.
일리야 레핀은 사회적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에는 연민의 시선으로 다가갔지만, 당시 사회주의 혁명의 급진성과 과격한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시 소련 정권의 수립 이후, 거듭된 귀국과 협력 요청에도 그는 응하지 않았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열한 명의 인부가 힘겹게 배를 끌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인부가 배를 끌고 있다기보다는 배에 결박돼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인부들은 하나같이 지쳐 보이고 상체를 앞으로 숙여 힘을 실어보려 하지만, 한 발짝도 떼기 어렵다. 가슴팍까지 끌어올린 끈이 없다면 모두 한꺼번에 ‘픽’하고 주저앉아 버릴 듯하다. 인부들의 얼굴은 대부분 까맣게 그을렸으며,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대열 맨 마지막의 인부는 흡사 유령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하다.
푸르른 하늘빛은 인부들이 딛고 있는 황량하고 어질어질한 느낌의 누르스름한 빛깔과 대조를 이루면서 인부들의 고단하고 비참한 삶의 모습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척박하고 메마른 강변 바닥은 울퉁불퉁 고르지 못하고, 무엇하나 의지할 만한 바위나 나무도 없이 낡아빠진 통발만이 나뒹굴고 있다. 그 와중에도 파이프를 물고 모자를 쓴 한 인부는 얌체처럼 살짝 힘을 보태지 않은 모습이 눈에 띈다. 그나마 자칫 어둡고 음울한 느낌으로만 전달될 수 있는 이들의 삶을 응원하면서 가벼운 농담을 던지는 듯하다.
대열 선두에서 인부들을 이끄는 노인의 눈빛만이 노동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노인의 얼굴은 일리야 레핀이 당시 가장 존경했던 성직자 카닌의 얼굴을 묘사한 것이다. 화가는 이 인물을 통해 현재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끌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갈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투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일리야 레핀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고통만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갈등과 불안에도 주목한다. 그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차르 체제에 반대하고 농민운동을 앞장섰던 혁명가들이 겪었던 고통 또한 외면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이다. 제목만으로도 이미 그 슬픔과 안타까움이 전해진다.
방안에 들어선 한 남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그림 속 모든 인물을 놀라게 한다. 일리야 레핀은 초상화의 대가답게 인물마다 순간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아들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것일까. 상복으로 보이는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두 여인 중 어머니가 엉거주춤 굽어진 허리를 펴면서 일어선다. 놀란 나머지 얼어 붙어버린 듯 살아 돌아온 아들을 쳐다보고 있다. 그 굽은 어깨 위로 아내로 보이는 여인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슬픔 혹은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다. 의자 팔걸이를 엄지와 중지 사이로 꽉 쥐고 있는 아내의 오른손이 그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오른편에 남자의 아들과 딸의 반응은 대조적이어서 더 인상적이다. 이 남자는 아마도 어린 딸이 기억도 할 수 없는 수년 전에 유배 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딸의 표정은 이 남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낯선 불청객의 등장에 경계심과 함께 불쾌함마저 숨기지 못하고 있다.
반면 반가워하는 어린 아들의 표정은 아빠의 귀환에 놀라면서 금세라도 아빠의 품속으로 달려들 기세다. 그 와중에 하인인 듯 보이는 여성이 문을 열어주면서도 이 집의 가장이 맞는지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남자의 눈빛은 형형하고 푹 팬 눈가의 그늘이 그간의 고초를 짐작하게 한다. 이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으면서도 가족들의 반응에 확신이 없는지 낯선 이방인처럼 왼손으로 모자를 움켜쥐고 오른손으로는 긴장한 듯 주머니 쪽을 자신도 모르게 지그시 누르고 있다.
이 어색한 순간이 지나고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순간 그림 속 인물들의 눈빛은 어떤 의미로든 이 남자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일리야 레핀은 이 신념에 가득 찬 지식인이 직면한 난처한 상황을 이처럼 생생하게 전달한다.
지금 우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
갈등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리야 레핀의 시선은 노동자, 지식인을 거쳐 절대 권력의 상징인 차르(Tsar)에게도 이어진다.
작품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 1581년 11월 16일>에서 일리야 레핀은 어린 시절부터 권력 투쟁의 한가운데서 증오와 복수심을 품고 성장해 폭군이 된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그의 아들 이바노비치 왕자를 살해한 사건을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아낸다.
폭정을 일삼던 이반 4세는 어느 날 아들 집을 방문했다가 임신한 며느리 엘레나의 복장이 무례하다며 격노하면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다. 이에 아들이 황제에게 항의하고 저주하자, 황제는 지팡이로 아들을 내리쳐 살해하고 만다. 이 장면은 살해 직후, 현실을 자각한 황제가 그제야 아들을 부둥켜안고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에 대해 공포에 휩싸여 비통해하는 모습이다.
이반 4세의 넋 나간 눈빛이 모든 걸 말해준다. 그의 눈빛은 어린 아들을 떨어뜨려 죽이려 한 빔비사라 왕의 눈빛이자 반대로 아버지인 빔비사라 왕을 굶겨 죽이려 한 아사세 태자의 눈빛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수많은 전쟁과 재난, 사고가 만들어낸 죽음의 진실에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우리의 눈빛일 수도
있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