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에서 차차차茶茶茶] 茶의 오묘함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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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에서 차차차茶茶茶] 茶의 오묘함을 말하다
  • 이창숙
  • 승인 2023.04.2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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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차, 선禪의 맛일까?
-초의선사와 『동다송』

다산(茶山)과의 만남

매년 봄 남쪽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차향은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 옛날 차를 즐기는 선인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차를 좋아하거나 우리 차(茶)에 관심이 있다면 초의선사(1786~1866)에 대해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초의(草衣)’는 법호이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다. 전남 무안 삼향면에서 태어나 15세에 나주 남평에 있는 운흥사로 출가했으며, 해남 대흥사 12대 종사이다. 시(詩), 선(禪), 차(茶), 불화(佛畫)에 능했으며 오늘날 한국의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초의에게 유가(儒家)의 철학적인 식견을 넓혀준 사람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다. 둘의 만남은 1809년, 아암 혜장(兒菴 惠藏, 1772~1811) 스님의 소개로 이루어진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과의 인연은 후일 사대부들과 교유하게 되는 토대가 됐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초의는 “다산을 따라 유서(儒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시를 배웠다”고 한다. 당시 불가(佛家)의 승려와 유가(儒家)의 문사들 사이에는 교유의 어려움이 있었는데, 초의가 쓴 「상정승지서(上丁承旨書)」에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근자에 어떤 요망한 산승(山僧)이, 혹은 제가 송암(松庵)에 머무는 동안 유림(儒林)으로 돌아설 조짐이 있다고 떠들어대어, 그 말이 은사 스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은사 스님도 덩달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진실로 이런 말 때문에 스승님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되어 왕래가 드물어 마음속이 거칠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시 모실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마음을 다 드러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정약용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며, 가르침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초의의 글이다. 이렇게 시작된 초의와 정약용의 인연은 아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1783~1859)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에서 정학연을 만나 학림암에 머물게 된 초의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도 만나게 된다. 추사와 그의 아우 산천도인 김명희(山泉道人 金命喜, 1788~1857)가 교분을 맺기 시작한 때는 1815년이다. 

초의가 만든 차가 처음부터 인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의 많은 경화사족(京華士族)과 교유가 확대된 것은 1830년쯤부터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주고받고, 때로는 차를 보내달라는 ‘걸명시(乞茗詩)’를 보내며 초의는 그에 화답시를 보낸다. 이렇게 초의차에 대한 애호층이 형성됐고 초의와 경화사족들은 품격 있는 조선의 차 문화를 즐겼다. 초의가 만든 차는 당시 유행했던 중국차와 비교되며,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조선의 차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편지는 됐고, 차만 보내시오”

당시 중국에서 유입된 차가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중국의 차와 초의차를 비교하는 내용의 글을 많이 볼 수 있다. 

“늙은 서생 평소 차를 좋아하지 않아, 

하늘이 그 어리석음을 미워해 학질에 걸리게 했네. 

더워 죽는 것은 걱정이 없으나 목말라 죽는 것은 근심이라, 

급히 풍로에 찻잎을 끓여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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