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적멸보궁 용연사
상태바
[일연이 꿈꾼 삼국유사 비슬산] 적멸보궁 용연사
  • 김남수
  • 승인 2023.03.28 1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슬산의 고승, 인악 스님
인악 스님 영정. 동화사 소장.  사진 성보문화재연구원 제공

평소에 임금님 그리워하며 마음을 썼는데, 

꿈속에서 두 개의 금 그릇을 분에 넘치게 받았네. 

가련하게도 산골에서 부질없이 늙어가니, 

성은에 보답할 길이 조금도 없구나.

비슬산 용연사(龍淵寺)에서 출가하고 입적한 인악 의첨(仁岳 義沾, 1746~1796) 스님이 쓴 시다. 세상사 인연을 모두 버리고 출가한 스님이 어떤 이유로 임금의 덕을 추모하는 글을 썼을까?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성 용주사를 창건할 때, 인악 스님은 증사(證師)로 불상의 점안을 주재했다. 대웅보전 삼존불의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과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어 임금으로부터 칭찬과 포상을 받았다. 정조는 선과 교에 이름을 떨치던 인악 스님을 초빙했고, 스님은 부름에 응답한 것이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중창한 사찰이고 아비에 대한 정조의 애절함을 생각할 때, 인악 스님 위치를 보여주는 일이다.

스님은 4년 뒤 꿈속에서 정조를 다시 만났고, 이 시는 꿈을 회상하며 지은 것이다. 선과 교를 겸비하여 조선 후기 불교를 ‘화엄의 바다’로 조성한 비슬산 고승 인악 스님을 따라가 보자.

 

조선 후기, 화엄의 바람

조선 후기, 침체했던 조선 불교에 ‘화엄’의 바람이 불었다. 화엄의 바람은 18세기에 이르러 호남에는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스님, 영남에는 인악 스님으로 이어졌다. 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화엄 연구가 활발했으며, 각종 화엄법회가 성행했다. 연담 스님과 인악 스님이 직접 교류를 했을 수도 있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없다. 다만 두 분을 잇는 다리가 있는데, 설파 상언(雪坡 尙彦 1707~1791) 스님에게서 시기를 달리해 수학했다는 점이다. 

1681년 어느 날, 중국의 배가 난파하여 전라도 임자도에 닿았다. 난파선에는 1,000권에 달하는 불경과 그릇이 있었는데, 『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이 그것이다. 『가흥대장경』을 수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인 스님이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 스님이다. 수많은 불서 중 중국 청량 징관(淸凉 澄觀, 738~839) 스님이 쓴 『화엄경(華嚴經)』의 주석서,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가 있었다. 성총 스님은 이를 간행해 유통했고, 설파 스님이 다시 복간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