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한라와 오름의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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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말로 몰랐던 제주불교] 한라와 오름의 만다라
  • 아촉
  • 승인 2023.02.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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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이 머무는 한라산
어승생악에서 바라본 한라산 북면. 어리목계곡과 윗세오름이 보인다.

한 사람이 산길에 흩어진 반달의 달빛을 밟으며 길을 걸었다. 산에 오르면 그 반달 저편의 숨겨진 빛이 보일까 했으나 이미 새벽이 들어선 그 산의 정상에서는 반달조차 기울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가 걸어왔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저 산 아래 저 나무 아래로 바람이 가는 길이 보였다. 그 길은 굽이진 산과 들과 강을 너머 전정각산에서 멈췄다. 저곳은 시타림. 장작 살 돈이 없어서 화장조차 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시체를 버리기 위해 찾는 그런 곳. 그 사람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들어서자 시체를 버리던 숲은 수행자의 숲이 되었다. 그 숲에서 그는 생로병사의 고해에서 벗어나는 진리의 길을 찾고자 극단을 넘나드는 고행에 접어들었다. 숲에서의 고행이 육 년도 지난 어느 날, 그 사람은 마을 여인이 건넨 유미죽 공양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행으로 무너진 몸의 기력을 회복한 후에 그늘이 좋은 보리수 아래로 갔다. 길상초를 깔고 앉았다. 달빛이 밝았다. 보름이었다. 달을 가리던 어둠의 그림자는 없었다. 불이(不二)였다. 찰나생(刹那生) 찰나멸(刹那滅)이 동시(同時)인 진리의 달이 우주를 환하게 비추었다. 달빛 아래 그 사람은 고타마 붓다라고 했다.

그 붓다의 달빛이 탐라를 비추었다. 너른 바다 한가운데 한 산이 탑처럼 우뚝 솟아 있고, 그 산의 동맥을 따라 봉긋봉긋한 오름들이 섬 전체에 실핏줄처럼 이어져 있는 탐라를 비추었다. 라즈기르의 영축산 여래향실에서 연꽃을 들어 보이던 고타마 붓다의 정법이 아라한들을 통해 달빛처럼 탐라에 퍼진 것이다.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에 의하면, 발타라 존자가 900명의 아라한과 함께 탐몰라주(耽沒羅洲)에 거주하면서 정법을 펼치고 중생을 수호한다고 하였는데, 그 아라한의 여래향실이 바로 한라의 영실이다. 이 『법주기』는 344년에 스리랑카의 대아라한인 난제밀다라가 정법을 수호하는 16명의 아라한들에 대해서 설법한 것인데, 난제밀다라가 생존했던 이 시기는 탐라 개국 시기로 추정되는 300~400년과 일치한다. 아라한, 나한, 혹은 존자라 불리던 그들이 머물던 영실은 수행자의 숲이라 하여 수행동 혹은 행도동(行道洞)이라고도 불렸다. 그곳의 오백나한은 탐라의 신성(神聖)이 되었고, 상원(上院)인 영실의 연꽃 향기는 중원인 법정사, 하원인 법화사로 이어졌다. 한라의 혈맥을 따라 오름으로 내려간 나한들은 곳곳에서 산신으로 머물렀다. 

그러나 한라산 영실 존자암은 고려시대 어느 시기에 소실되었고 그 천불봉은 은하수만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다만 존자암은 탐라의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한라산 등반을 위한 고관대작들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위치를 불래오름 중턱으로 옮기면서까지 오래도록 명맥을 이어온 것이 아닌가 추정해보는 것이다. 

영실 존자암은 사라졌지만 그 가까운 산등성이에는 수행굴이 있다. 수행굴에 관한 기록은 김상헌의 『남사록』(1602), 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1609), 이익태의 『지영록』(1694), 이형상의 『남환박물』(1704) 등 이외에도 많다. 특히 『남사록』에는 “窟中可容二十餘人(굴중가용이십여인) 古有高僧休糧入棲之處也(고유고승휴량입서지처야)”라고 하여 “굴은 가히 20여 명을 수용할 만한데, 옛날에 휴량이라는 고승이 있어서 들어와 머물던 곳이다”라고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고승휴량(高僧休糧)’은 곡기를 끊고 수행에만 매진하는 ‘휴량승(休粮僧)’을 뜻하는 단어로, “예로부터 덕 높은 휴량승이 있어서 들어와 머물던 곳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수행굴에서 한라산 영실 존자암의 휴량승들은 화천(化天)한다. 선정에 들어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 휴량의 맥이 오래 이어졌기에 이곳은 수행의 골짜기라 불릴 수 있었다.    

영실 존자암이 불래오름으로 떠나자 그 빈자리에 어느 날 미륵이 찾아왔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새벽 산길을 걸어 또다시 길을 내면서 그곳은 영험한 산신 기도처로 알려졌다. 세 분의 미륵이 계시는 미륵존불암이라는 소문도 무성해졌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흐른 지금 한라산 영실의 그 미륵존불암은 단지 추정만 가능할 뿐, 그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1925년 간행된 『불교』 제17호의 기고문에는 한라산 어딘가에 모셔져 있는 작은 불상의 뒷면에 ‘삼성입적지지(三聖入寂之地)’라는 예언이 새겨져 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불상의 존재가 한라의 산사람들 사이에서 풀지 못한 전설로 남아 있는 것처럼, 영실 미륵존불암도 여전히 한라의 구름안개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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