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수좌, 구정(九鼎) 선사”
송광사 하면 자연스레 뒤따르는 단어는 여름수련회였던 적이 있다. 여기에 ‘사자루 아래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첨가하면 수련회에 다녀온 사람들로 인정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받았다. 송광사 여름수련회는 대입시를 방불케 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합격 통보를 받기 위해서는 왜 참석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구구절절한 사연과 얼마나 깊은 불심을 지녔는지를 읍소해야만 했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을 재수한 끝에 겨우 참가할 수 있었다. 반세기를 지난 지금도 1971년에 시작한 송광사 여름수련대회가 여전히 열리고 있으니, 이것은 재가자 교육을 위해 수련회를 시작한 구산수련(九山秀蓮, 1910~1983) 스님의 법력이자 원력으로 볼 수 있다.
스님은 은사인 효봉 스님의 유훈을 받들어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이루어 보조지눌 스님의 맥을 잇는 목우자 선풍을 자리 잡게 했고, 나아가 불법이 미약한 전라도의 절들을 재정비해 다시 옛 광명을 되찾게 만들었다. 스님의 정진력은 지역적 편견으로 서로 다툼이 생기는 선방에서도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큼 치열했다. 효봉 스님은 누가 전라도 사람을 통칭해 욕하면 “우리 구산이 봐라. 전라도 사람 욕하지 마라, 이렇게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 봤는가?”라며 그들을 침묵하게 했다고 한다. 구산 스님은 시대의 편견과 개인적 편견에 오직 수행을 통한 당신의 법력으로 주위를 감화시켰다. 구산 스님은 “중은 본분인 ‘마음 닦는 일’에 전념하고, 절에 있을 때나 절 밖에 있을 때나 중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며 본분사 도리를 평생토록 강조하며 엄격하게 스스로를 경책했다. 증손상좌 오경 스님의 회고(『깨어남의 시간들』, 이강옥 저, 돌베개[2019])는 처절한 구산 선사의 수행관이 압축돼 있다.
“우리 구산 스님 별명이 울내미야, 울내미(‘울보’의 경상도 말, 전라도 말로는 ‘움보’). 법문하면서 맨날 울어.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세상을 모르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남에게 하고, 이게 옳니 그러니 하고 있는가, 내가 진리를 모르는데, 그런 내가 남에게 이거야 저거야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할 수 있느냐’라며 너무 사무치게 말씀하며 우시지. 사람들은 구산 스님이 도인이니 아니니, 똑같은 법문을 하니, 견처(見處)가 있니 없니 하지만 내게는 언제나 같은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로 들리는 거야, 들을 때마다 정말 감동하게 되는 거지, 일흔다섯 살 노인네가 처음 출가한 스무 살 청년의 그 절절한 진리에 대한 열정을 오롯이 간직하고 계신 거야. 내가 50년 뒤에도 저런 순수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을까. 언제나 나에게 물어야 했지.”
구산 스님의 속명은 진양 소씨 봉호[蘇䭰鎬]로, 1909년 음력 12월 17일(양력 1910년 1월 27일) 전북 남원시 내척리 509번지에서 6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별세(1923년)로 소학교만 졸업한 채, 용성소학교 정문에서 ‘명치(明治)이발관’에서 이발사를 하며 집안을 도왔다. 그래서 이발사 출신이었던 부처님 십대제자에 비유해 우바리존자로도 불렸다. 이강옥 교수는 시골 이발사라는 구산 스님의 전직이 출가의 길을 다진 것으로 평했다. 스님은 아주 키가 작은 이발사였지만 키 큰 손님들은 이발 의자에 앉으면 저절로 눈높이가 같아졌기에 평생토록 상대방에 가식 없이 눈높이를 맞춰 법을 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보았다. 이발(理髮)은 ‘머리를 다듬다’는 뜻으로, 지나치게 짧게 잘라도 안 되고 지나치게 길게 잘라도 안 되니 중도의 도리와 살활(殺活)의 원리를 이미 터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 스님처럼 구산 스님은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노동을 함으로써, 무식하지만 무식하지 않았고 유식하면서도 그 지식의 한계를 넘어선 무식자로 생애 이른 시기부터 이미 불법의 요체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산 스님은 칠십의 노구에도 몸소 밭일을 하여 “일 수좌, 구정(九鼎, 스승이 시키는 대로 솥을 아홉 번 걸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 선사”라 불리기도 했다. 방장인 노스님이 대중들과 똑같이 운력과 정진, 거기다가 법문 및 대중접견까지 도맡았으니 얼마나 힘이 드셨겠는가. 그러다 보니 선방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발라당 발라당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이 모습은 젊은 수좌들에게 오히려 경책이 됐다. 치열한 수행력으로 ‘대추 방망이’로 불린 스님의 한창 시절을 그릴 수 있었다.
돌사자(石獅子)라는 별명도 갖게 됐는데, 스님이 “나는 조계산 숲속에서 채마밭이나 매다가 오가는 운수객들의 묻는 말에 응답이나 하고, 동서양 다른 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인간의 행로를 물으면 방향을 가리키며 맞고 보내는 네거리의 돌사자다”라며 스스로가 그리 칭했기 때문이다.
네 번의 큰 깨침
불법과의 인연은 27세 때 병을 얻어 이듬해(1935년) 진주에 사는 하(河) 거사와의 만남으로 맺어졌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이며, 사람마다 원만히 갖추어 있는 자성 자리는 본래 청정커늘 어디 병이 있겠느냐”라는 말에 느끼는 바가 있어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 들어가 백일 관음기도를 하니 부처님 가피를 입게 됐다. 1937년, 부처님 오신 날(음력 4월 8일)에 송광사 효봉 스님을 찾아 출가했고 그의 제자가 됐다. 남의 머리를 잘라주던 사람이 은사 스님의 손을 빌려 자기 머리카락을 완전히 잘라버린 날이었다.
스님은 ‘이뭣고’ 화두로 간화선 수행을 했는데, 이후에 스님이 후학들을 지도하는 대표적 화두이기도 하다. 화두를 드는 이유를 좌선 중에 일어나는 번뇌망상에서 탈피할 수 있는 명약으로, 청룡의 보검에 비유해 설명했다.
“좌선을 하고자 면벽관심(面壁觀心)을 할 때, 화두 없이 눈을 감고 모든 번뇌를 끊으려고 앉았으면 망상이 한없이 일어난다. 망상을 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반대로 더욱 치열하게 일어나는 것이 마치 풍랑처럼 더욱 번거로워져 오히려 큰 병이 된다. 화두는 팔만사천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청룡보검(靑龍寶劍)이며 명약(名藥)이다.”
__ 『석사자』 중에서
스님은 화두와 관련해 마음의 본체와 작용(體用)에 관해서는 보조지눌 스님의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는 반대인 독특한 해석을 했다. 스님은 화두를 들면 마음 안의 경계에서 번뇌가 제거되고 있기에 성성(惺惺)한 상태라 했다. 마음의 본체를 혜(慧)로 본 것이다. 바깥 경계는 육근과 육적이 적적(寂寂)하다 보았으니, 마음의 작용을 정(定)으로 본 것이다.
스님의 수행은 크게 네 분기로 나눌 수 있다. 첫 정진은 정각토굴의 깨침이다. 경북 청암사 수도암의 정각토굴에서 생사를 건 정진에 들어갔는데, 턱밑에 날카로운 송곳을 놓고 졸 때마다 턱밑을 찌르도록 해 놓고 수행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앉아서 졸 때 앞뒤가 아니라 좌우로 고개를 흔드는 습관이 생겼다. 여기서(1943년) 용맹정진 7일 중 시계 치는 소리를 듣고 문득 깨친다.
다음, 가야산 중턱 법왕대(法王臺) 토굴의 정진이다. 은사 효봉 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가게 되어 1947년 가야산 중턱에 법왕대 토굴을 짓고 생쌀과 솔잎만으로 3년간 장좌불와를 했다. 스님은 일부러 호랑이굴 옆에 토굴을 지었다. 수마와 잡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장소였다. 그런데 오히려 호랑이가 멧돼지를 쫓아내는 등 스님을 보호하며 정진에 일념하도록 해줬다. 처음 한 철을 마치고 별 소득이 없어 하산하려 하니 꿈에 산신이 나타나 “이곳은 스님과 인연 터이니 떠나지 말고 한바탕 더욱 용맹정진하라, 금생 복으로는 공부 성취가 어려우니 내생 복을 당겨 받으시오”라 당부했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더욱더 박차를 가해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됐다.
그다음, 진주 응석사에서 정진하던 중 깨달아(1951년 정월 보름) 부산 동래 금정사에 주석하던 은사 효봉 스님께 게송을 바치고 인가의 전법게를 받았다. 이후에도 정진을 계속한 스님은 1961년 11월 23일 광양 백운산 ‘상백운암’에서 네 번째 큰 깨침을 얻었다.
스님은 눈 뜨지 못한 자들의 눈이 뜨일 수 있도록 누구에게나 온 정성을 다해 설법했다. 오죽했으면, 해외를 순방 기간에도 서찰을 통해 스님은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내렸다. 열심히 정진하는 제자를 조용히 불러 “부처님 가르침 전할 사람은 너밖에 없네, 조금만 더 하면 한 소식 하겠네”라 격려하니 제자는 분발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재가자들을 위해 일상에서 수행을 구현할 수 있도록 일주일 동안 연결되는 생활불교의 길인 칠바라밀(七波羅密, 일곱 가지 꿈 깨는 법)을 제시했다. 월요일은 베푸는 날(보시), 화요일은 올바른 날(지계), 수요일은 참는 날(인욕), 목요일은 힘쓰는 날(정진), 금요일은 안정의 날(선정), 토요일은 슬기의 날(지혜), 일요일은 봉사의 날(만행)로 지정하여 매일 실천하도록 유도했다. 외국인들이 한국 선을 배울 수 있도록 한국 최초의 국제선원 ‘불일국제선원’도 개원했다.
한국불교사에 수행과 교화로 큰 업적을 남긴 스님이 송광사 삼일암 미소실에서 좌탈(坐脫)하신 날(1983년 12월 16일, 세납 75세·법납 46년)까지 제자들에게 늘 강조한 당부가 있었다. “중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이다. 이 말씀은 수행자의 본분을 잊고 사판의 명함을 얻는 데만 허덕이는 지금 스님네들에게 내리는 경책이다. 덧붙여 스님은 “법을 조금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옛 사람도 참되게 수행하는 자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하였거늘 하물며 자기 마음을 밝히지 못한 자는 말해서 무엇하겠냐”고 반문한다.
“입은 옷 좋아해도 언젠가는 갈아입고
새 옷을 입었다손 사람마저 달라지리
이 마음 백 년 뒤에 무슨 옷을 입으련고.”
__ 1982년 늦은 봄, 구산 스님
효신 스님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
사진. 유동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