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는 허무주의자 편집자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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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허무주의자 편집자의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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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1.2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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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각 강설, 한국선불교연구회 논강 | 504쪽 | 27,000원

 

저는 스님도 아니고 불교 신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불교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다 보니 “공(空)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애초에 저는 이런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공을 공이라고 하면 이미 공이 아니지.” 아아, 얼마나 편리한 대답입니까? 충분한 경전적 근거가 있으면서, 무엇보다 저도 잘 모르는 것을 허둥지둥 설명할 필요 자체를 없애버리는 방식입니다. 단, 이런 식으로 대답할 때는 목소리를 은근하게 하고, 눈빛은 먼 허공을 응시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우수에 젖은 시인 내지는 초탈한 도인 비슷한 분위기로 말해야 합니다. 구구절절 친절하게 설명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공이 뭔지 난 물론 알고 있지, 하지만 과연 너 같은 중생이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후훗~ 뭐 이런 거죠. 하지만 저는 곧 깨달았습니다. 이런 스킬은 부처님이나 고승대덕이나 하다못해 차은우나 박보검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저처럼 없어 보이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공에 대해 대답을 할 때면 상대방의 표정에는 항상 이런 느낌이 역력했습니다. “재수 없네.”

저는, 즉 재수 없는 인간은 좀 더 재수 있는 대답 방식을 궁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기, 무상, 무아 등을 들먹이면서 공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범적인 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인상적인 설명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설명에 따라오는 반응은 대개 “그러니까, 허무주의라는 거잖아.”였기 때문입니다. “어… 그건 말이지, 허무주의하고 다른 것인데, 뭐랄까…” 하고 부연 설명을 해 봤자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허무주의를 두둔하는 허무주의자로 의심받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즉 허무주의자는 “공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잘 몰라염. 꺄르륵~” 하지만 저는 공에 대해서 어떻게든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 자주 처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결국 재수 없는 인간이 되거나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재수 없는 허무주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금강경삼가해 강설을 논강하다> 작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금강경>은 공(空)에 대해 설명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요. 오래전에 처음으로 <금강경>을 읽던 당시, 저는 거기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언설들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 공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패닉에 빠졌습니다. 공과 저의 그렇고 그런 관계는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패닉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금강경>을, 그리고 거기에 펼쳐지는 공을 일로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며 인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불교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재수 없지 않으면서 허무주의라는 오해도 사지 않는 방식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강설과 논강을 통해 <금강경>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낸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며 저는 그런 방법의 한 모델을 보았습니다. 불교계의 여러 숙수들이 한데 모여 종잡기 어려운 공(空)의 개념을 이리저리 곱씹고 주물럭주물럭 해 놓은 결과물이 여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바쁘면 바쁜 대로 그게 공부인줄 알고, 아무 일 없으면 없는 대로 공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쁘면 바쁘다고 힘들어하고, 아무 일 없으면 없다고 괴로워하지요. 공부하는 사람은 이 낱낱의 일을 공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5쪽)

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종종 공이라는 손가락을, 연기나 무상이나 무아라는 손가락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는 도대체 뭐가 있냐구요? 다만 그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빛나는 달이 여여(如如)하게 책 구석구석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 달은 너무도 평범한 언어로 그려져 있어서 그것이 달인지 뭔지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여법한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입니다. 실답고 여법하게 말하는 법은 오직 그런 평범함뿐인지도 모릅니다.

원고를 읽다 보니 저의 지난날이 조금 억울해졌습니다. 그래, 이런 방법도 있는데 왜 난 몰랐을까? 난 바보야, 바보라구! 라고 자책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가만 있어봐,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을 내가 인용해 써먹으면 될 것 아닌가? 히힛, 난 역시 똑똑해. 아마도 올해부터는 재수 없는 허무주의자라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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