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과 수행 공동체, 실상사] 실상사의 역사와 문화
상태바
[돌봄과 수행 공동체, 실상사] 실상사의 역사와 문화
  • 주수완
  • 승인 2022.12.27 18:3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격의 선문禪門, 실상사에서 열리다
구산선문 최초 가람 지리산 실상사. “북산에는 도의,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하여 실상사는 홍척 스님이 선문을 개창했다. 창건 당시의 탑과 불상, 석등이 남아 있다.

9산선문(九山禪門)의 최초 가람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국사(洪陟國師)가 개창한 사찰로 통일신라 후기에 확립된 9곳의 선종 사원 중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다. 처음에는 지실사(知實寺)로 불렀지만, 개창한 홍척국사를 기리기 위해 존칭인 ‘실상선정국사(實相禪庭國師)’에서 ‘실상’을 따와 고려 초 무렵부터 실상사(實相寺)로 불렀다. ‘실상’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결국 ‘나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곧 붓다이므로 ‘실상’은 참선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궁극의 목표일 수도 있겠다. 특히 원효 스님께서 『법화종요』에서 “실상이란 법신(法身)의 체(體)이며 변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라 설명한 부분으로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이데아’와도 통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四山碑文) 중 하나인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에는 “북산(北山)에는 도의(道義), 남악에는 홍척”이라고 하여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와 지리산 실상사의 홍척을 신라 선종의 양대 산맥으로 칭송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모두 당나라로 건너가, 6조 혜능의 제자인 마조도일(馬祖道一) 문하였던 서당지장(西堂智藏) 스님에게 배웠으므로 사실은 동창인 셈이다. 홍척은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그중에서 으뜸은 수철화상(秀澈和尙, 817~893)이었고, 그 외에 제42대 왕인 흥덕대왕, 선강태자 등을 문하에 뒀다고 하니 당시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홍척은 그의 스승인 서당지장의 법을 이어가는 것은 수철에게 달려 있다고 하여 그에게 실상산문을 부탁했다. 이후 수철은 산천의 탑을 예배하러 돌아다니기도 했고, 참선뿐만 아니라 화엄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 역시 경문왕으로부터 대사로 추증받아 궁궐에 불려가기도 했는데, 그에게 경문왕이 물은 것은 선종과 교종의 같고 다름이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를 기록한 수철화상비문에 새겨진 해당 내용의 글자가 결실돼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앞서 참선과 화엄을 동시에 추구한 것을 보면 수철은 상당히 폭넓은 종교적 성향을 지니면서 그 둘을 겸비할 것을 조언하지 않았을까 싶다. 뒤이어 그가 선을 단계별로 나눠 설명했다거나, 다음 문장에서 『십지경』을 지었다는 이야기들을 참고해 볼 때, 참선 수행을 하되 이를 화엄적으로 풀어 해석함으로써 다소 막연하게 흐를 수 있는 선법을 체계화한 게 아닐까 한다.

홍척의 제자로서 수철화상과 더불어 이름을 날린 편운화상도 빼놓을 수 없는데, 성주 안봉사를 창건했다는 기록 외에는 행적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편운화상탑이 실상사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입적할 때까지 실상사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은 잘 찾아보기 어렵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조 연간에 이곳이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1586년 지리산을 다녀간 양대박의 『두류산기행록』에서 “절은 폐허가 된 지 100년이 지나, 무너진 담과 깨진 주춧돌이 가시덤불 속에 묻혀 있고, 철불이 석상(石床) 위에 우뚝 앉아 있었다”라고 실상사를 기록하고 있다. 실상사 스님들은 1679년(숙종 5) 무렵까지 실상사를 대신해 백장암에서 사세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철불과 석탑, 석등만 남아 있던 실상사는 1690년 침허대사(枕虛大師)의 주도로 300여 명의 스님이 중건을 시작하며 사세를 회복했으며, 1821년(순조 21년) 의암(義巖) 스님이 중창해 대가람을 형성했다. 이후 고종 연간에 절터를 빼앗기 위한 방화 사건이 일어나 1882년(고종 19)에 삼중창이 이뤄졌다.

약사전의 부처님 

실상사는 이처럼 긴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경내에 이들 역사를 함께한 많은 성보문화재들이 전해진다. 그 가운데 절의 역사를 알리는 첫 문화재는 단연 거대한 철조여래좌상, 보광전 앞의 동·서 삼층석탑 및 석등이다.

거대하고 웅장한 철조여래좌상은 실상사 창건기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홍척국사가 처음 창건했던 실상사는 지금의 백장암 자리였고, 현재의 실상사로 사세를 확장한 것은 수철화상 때였으므로, 그 무렵 석탑·석등과 함께 조성됐을 것이다. 높이가 2.66m이니 만약 이 부처님이 서 계셨다면 높이 5.3m가량의 장육상이 되는 규모다. 하지만 신체에 비해 커다란 얼굴 때문에 그보다 더 거대한 불상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이 이 철불은 경직되고 투박한, 그래서 통일신라 말기의 도식화된 양식이라 평가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철이라는 재료를 사용한 것에서부터 의도적으로 파격적인 미감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선종이란 원래 언어적 사고의 틀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관적으로 다가가는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존의 인체를 재현하는 듯한 불상의 틀을 깨뜨리는 것은 곧 언어적 틀을 깨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하겠다. 

마치 “마조 스님께 무엇을 배우셨습니까?”라는 제자의 질문에 “북을 치고 나면 피리가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답했던 서당지장 스님이나,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물을 마시면 목마름이 해소된다”가 실상임을 강조하는 실상사 회주 도법 스님의 말씀이나 모두 뜻밖의 해답일 수 있지만, 또한 너무도 당연한 대답이기도 해 파격의 매력이 있다. 실상사 철불은 바로 그런 미감을 담고 있다. 

원래 이 부처님은 약사불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복장 조사에서 발견된 원래 손의 수인을 통해 아미타부처님으로 조성된 것을 알게 됐다. 근래에는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조성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도상이 노사나불로 많이 조성됐으며, 또한 우리나라 선종사찰에서도 노사나불과 통하는 비로자나불을 많이 모셨던 점을 감안해, 원래는 비로자나불로 조성됐을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됐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