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해와 ‘헤어질 결심’ 섰을 때 ‘여기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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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해와 ‘헤어질 결심’ 섰을 때 ‘여기어때’?
  • 최호승
  • 승인 2022.12.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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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소확행#_명승이 감춘 기도도량
두 산봉우리가 말의 귀 모양을 한 진안 마이산은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품은 명승이다. 이곳에 ‘한국의 불가사의’라 불리는 마이산탑사가 있다. 

모두 다 안다. 그래서 기다렸다. 붉게 타던 나무는 이파리 내려놓고, 차갑던 바람은 까칠함을 더했다. 뜻밖이다. 그래서 설렌다. 바람이 차서 볕이 더 따뜻하고, 기다렸던 소식처럼 첫눈이 내린다. 겨울이다. 1년 열두 달 중 마지막 페이지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묵은해와 헤어질 결심이 서고, 새해엔 달라질 결심을 세운다면 여기는 어떨까? 전국에서 아름답다고 소문난 명승이 간절함을 감춰둔 그곳, 기도도량에서 겨울의 첫 번째 페이지를 쓴다. 

 

무릉도원, 암벽에 올라탄 절경의 도량

명승(名勝)은 뛰어나게[勝] 아름다워 이름난[名] 경치를 뜻한다. 이렇게 자연유산이자 역사문화경관이 우수한 지역은 나라에서 명승으로 지정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명승엔 예부터 기도를 올리거나 비원을 새기거나 망자의 혼을 달래던 고찰이 있다. 

무릉계곡이나 암벽에 올라탄 절경에 자리한 도량은 예부터 기도처로 유명했다. 설악산은 울산바위, 내설악 만경대, 비선대와 천불동계곡 일원, 용아장성 등 명승지가 많다. 그중에서도 설악산 비선대와 천불동계곡 일원, 설악산 내설악 만경대는 5대 적멸보궁 중 하나인 봉정암 그리고 관세음보살 영험담이 동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오세암이 있다. 

5세 아이와 관세음보살 이야기가 전해지는 설악산 오세암
설악산 백담사를 끼고 흐르는 백담계곡

비선대와 천불동계곡을 거쳐 소청에 이르는 등산코스에 빠지지 않는 봉정암은 기도객이 끊이지 않는 도량이다. 종일 산에 올라 쪽잠을 청한 뒤 새벽부터 기도하는 이유는 봉정암에 자장 율사가 부처님 사리를 모셨다는 불뇌사리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불뇌사리보탑을 기점으로 동으로는 가야동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이 펼쳐진다. 오세암은 용아장성, 공룡능선, 나한봉 등 절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만경대를 바라보고 있다. 특히 폭설로 길이 끊긴 절에 몇 달간 홀로 남겨진 5세 아이가 죽지 않고 관세음보살을 염했다는 신비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설악산 봉정암 불뇌사리보탑을 기점으로 동으로는 가야동계곡과 만경대, 공룡능선이 펼쳐진다.

동해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에 흐르는 약 4km에 달하는  ‘무릉계곡’의 신비한 경치가 유명하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말 그대로 ‘무릉도원’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고려의 이승휴가 중국과 한국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역사서 『제왕운기』를 이 계곡에서 집필했다. 몇 년 전 공개한 두타산의 베틀바위도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 계곡 일원에 있다. 

산스크리트어 ‘dhuta’의 소리를 한자로 받아 적은 ‘두타’는 ‘불도를 닦는 수행’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절과 인연 깊은 두타산에는 삼화사와 관음암 외에도 중대사, 거제사 등의 절터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삼화사는 나라에서 망자의 혼을 달래던 의식, 국행수륙재를 지낸 사찰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실 등 영혼을 위로하고자 태조 4년에 시작했고, 지금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무릉계곡 품고 있는 두타산 베틀바위
두타산 무릉계곡 옆에 자리한 국행수륙재를 지내던 삼화사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품은 명승도 있다. 두 산봉우리가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다는 뜻의 진안 마이산(馬耳山)은 백악기의 퇴적암, 줄사철나무 군락,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은수사 청실배나무 등 많은 문화유산이 있다. 여기에 ‘한국의 불가사의’라 불리는 마이산탑사가 자리했다. 수박 크기 돌덩이부터 엄지손가락 같은 작은 돌멩이까지 돌에 돌을 포개 얹은 돌탑과 석탑들이 즐비한 도량이다. 수행을 위해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하던 이갑룡 처사가 참회의 뜻으로 쌓은 탑들이 100여 년 넘게 풍파에도 쓰러지지 않은 곳이다. 그런가 하면 고창 선운산 도솔계곡 일원에 민중의 염원이 서린 곳도 있다. 이 명승에는 13m의 압도적인 마애불이 조각된 거대한 암벽 위에 지장기도도량 도솔암이 앉았다. 가슴 아래 비기(祕記)를 품은 마애불은 백성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이 비기가 열리는 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개벽이 온다는 믿음이 있어서다. 이 마애불의 복장물을 1892년에 동학교도가 빼간 일이 1894년 동학혁명의 도화선이라는 말도 있다. 

수많은 돌탑과 석탑이 불가사의한 마이산탑사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_IR스튜디오

바위 형상이 아주 빼어나 예부터 ‘작은 금강산’으로 불린 오산은 사성암이 있어 구례 오산 사성암 일원이라는 명승이 완성된다. 정상쯤에 자리한 사성암은 오산의 바위들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데 의상, 원효, 도선, 진각 스님 등 한국불교사에서 내로라하는 4명의 고승이 수행했다는 도량이다. 구례와 지리산 연봉을 흐르는 섬진강을 내려다보며 노을까지 감상할 수 있는 명당이기도 하다. 

고승들이 수행했다는 구례 사성암의 노을 ⓒ한국관광공사 사진갤러리_송시봉

 

강물 모이는 바다처럼 품 너른 도량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흐른다. 그래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모든 간절함을, 다짐을, 바람을, 그리고 염원을 다 품는 게 기도도량이다. 명승 중에 바다를 마당으로 두거나, 바다처럼 너른 품을 가진 사찰이 많다. 곧 명승으로 지정될 여수 금오산 향일암 일원엔 향일암이 있다. 해를 향하는 암자, 향일암(向日庵)은 이름처럼 남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해돋이 경관, 하늘과 맞닿은 봉황산(금오산의 모산)의 지평선, 여수만 건너편으로 보이는 남해 금산 등 해상경관 등이 수려하다. 거북이 생김새를 닮은 금오산이 향일암(=불경)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 형상인데, 마치 거북이가 불경을 갖고 남해 용궁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원효 스님이 창건하고 수행하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이 있어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관음기도도량이다. 

해를 향하는 암자 여수 향일암 일출 ⓒ문화재청
명승으로 지정 예고된 여수 향일암 일원 전경 ⓒ문화재청

이뿐일까? 명승엔 우리나라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관음기도도량이 여럿 있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 관동팔경 중 동해 일출이 아름다운 곳으로 기록한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관음기도도량 낙산사 홍련암이 명승 이름이 된 곳이다. 의상 스님이 671년에 창건했다는 낙산사와 낙산사 창건 당시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해안 암벽 위 의상대, 홍련 속 관세음보살을 만났다는 홍련암이 있다. 

홍련 속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는 홍련암에서 바라본 의상대. 관동팔경 중 동해 일출이 가장 아름답다.

명승 남해 금산의 보리암도 못지않다. 의상 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쌍두마차 원효 스님과 관련 있는 관음기도도량이 보리암이다. 원효 스님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보광사라고 해서인지, 금산은 보광산이라 불렸다. 그런데 태조 이성계가 여기서 백일기도한 뒤 왕위에 오르자 이름이 바뀌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비단을 두른다는 뜻으로 ‘비단 금(錦)’자를 써서 금산이 됐다. 보리암도 태조 이성계가 조선 왕실의 기도처로 삼고 바꾼 이름이다. 보리암 주변 원효 스님이 참선했다는 좌선대에서 보리암과 남해, 금산 자락을 굽어보는 경관이 아름답다. 

태조 이성계가 왕실의 기도처로 삼은 남해 금산 보리암 전경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우리네 마음을 바다처럼 너른 품으로 껴안은 도량도 명승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에 등재된 법주사는 명승 속리산 법주사 일원에 속했다. 법주사를 중심으로 속리산 천왕봉과 관음봉을 연결하는 곳곳이 명승이다. 

법주사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5층 목탑 팔상전(국보)이 유명한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이 세상에 왔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설법이 펼쳐질 곳이 법주사다.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 『미륵성불경』 등 미륵삼부경에 미륵이 3회의 큰 설법을 베푸는 도량 중 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56억 7000만 년 뒤라는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미륵이 오고야 만다는 믿음을 품은 도량이다. 

미래의 부처님 미륵이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설법을 펼칠 도량, 속리산 법주사의 야경 ⓒ보은군  

산봉우리를 병풍처럼 두른, 전쟁도 범접하지 못한 곳이 있다. 명승 두륜산 대흥사 일원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서산 대사가 일찍이 이렇게 예언했다. “전쟁과 화재를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으로[三災不入之處], 만 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다.” 한국전쟁도 비켜 간 <웰컴 투 동막골>의 동막골 같은 안전지대다. 이곳의 핵심은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신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이라고 할 수 있다. 왼쪽과 오른쪽 아래 조각된, 부처님을 올려다보는 공양천인상의 얼굴이, 꿇은 무릎에서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삼재가 미치지 못할 도량 대흥사 위에 자리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명승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은 비가 오게 빌며 제사를 지내던 오랜 기도도량이다. 청평사는 973년(고려 광종 24)에 백암선원으로 창건, 천년 넘게 이어져 온 도량이다. 구송폭포는 물론 많은 폭포와 계곡, 여기를 장식하는 멋들어진 바위가 청평사 주변을 이루고 있다. 조선조에는 비를 기원하던 기우단(祈雨壇) 터, 하늘에 제사 지내던 천단(天壇)과 제석단(帝釋壇) 터가 여기에 있다.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촛대 모양의 촛대바위와 송대바위 그리고 거북바위 등이 있는 곳이 천단이라고 알려졌다.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인 햇볕, 공기, 바람은 세상에서 가장 값지다. 그런데 공짜다. 빼어난 자연과 문화유산인 명승도 그렇다. 명승이 감춘, 신비하고 영험한 이야기가 서린 기도도량은 조금 다르다. 입장료가 있다. 믿음이다. 용수 스님이 쓴 『대품반야경』의 주석서 『대지도론』엔 “불법의 큰 바다에 오직 믿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섣부른 망설임은 금물. 믿음의 씨앗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무 애쓰지 말자. 왜? 씨앗은 본래 꽃으로 필 운명이니까.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던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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