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말을 걸다] 박남준 ‘억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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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말을 걸다] 박남준 ‘억새’
  • 동명 스님
  • 승인 2022.11.0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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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출가수행자인 동명 스님의 ‘시가 말을 걸다’를 매주 화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원문은 다음카페 ‘생활불교전법회’, 네이버 밴드 ‘생활불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명성산 억새바람길
명성산 억새바람길

억새
_박남준

꽃이 있었네. 하얀꽃
하얗게 새어서, 새어서 죽어 피어나는 꽃

바람 부는 들녘의 언덕에는 하얀 소복으로 바람 날리며 너울거리는 억새들의 잔잔한 한숨이 묻혀 있다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억새밭의 곁에 서면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

(박남준 시집, ‘풀여치의 노래’, 푸른숲 1992)

[감상]
군대에서 보초 서던 시절 잊지 못할 풍경 중의 하나가 억새에 달빛이 살포시 내려앉은 모습입니다. 낮에는 새하얗게 보이지 않던 억새꽃이 달빛이 비치면 화장한 일본 여인의 얼굴보다도 새하얗게 변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스산했던 마음이 시려지면서도, 그 아름다움에 황홀해하곤 했습니다.

억새꽃은 어떤 꽃보다 생명이 질깁니다. 다른 꽃들은 지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이지만, 억새꽃은 피어 있을 때도 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고, 피었다가는 아예 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억새꽃에만은 다음 시들이 맞지 않습니다.

“꽃이 필 때는 한참이더니
질 때는 잠깐이더군”(최영미, ‘선운사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낙화’)

억새꽃은 꽃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하게 존재감이 없다가 밤이 되어 달빛이 비치면 어떤 꽃보다도 아름답게, 아니 ‘앓음답게’ 개화합니다. 그래서 박남준 시인의 시가 탄생했을 것입니다.

박남준 시인은 억새의 하얀 빛깔을 ‘하얀 소복’으로 바라봅니다. 그렇게 보니 억새밭은 “이 땅을 일구며 지켜온 할머니의 그 할머니의 정결하고도 기막힌 삶들의 숨결 같은”, “어데선가 나타나는 새하얀 꽃상여의 행렬”이 됩니다. “흔들리며 흔들리며 물결쳐 오는 그 애잔하던 울음”이 됩니다.

오늘은 달빛을 볼 기회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초저녁 서쪽 하늘에 약간 비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달빛을 안은 억새꽃을 구경해보시지요. 우리의 할머니들이 하얀 소복을 입고 애잔하게 우는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아도 좋겠습니다.

동명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1989년 계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 1994년 제13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인으로 20여 년 활동하다가 지난 2010년 출가했다. 저서로는 시집 『해가 지지 않는 쟁기질』(제1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 『미리 이별을 노래하다』, 『나무 물고기』, 『고시원은 괜찮아요』, 『벼랑 위의 사랑』과 산문 『인도신화기행』, 『나는 인도에서 붓다를 만났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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