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장경판전, 왜 불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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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장경판전, 왜 불타지 않았을까?
  • 함성호
  • 승인 2022.09.2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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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역설
-풍수지리와 건축으로 본 장경판전
가야산이 품고 있는 해인사는 형국론으로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이라고도 한다. 산세가 베개 같은 것에 기대 비스듬히 몸을 편안히 한 채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을 닮았다. 

한국의 많은 목조건물은 봄 산불, 겨울 실화, 전란 등에 의해 온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예가 드물다. 해인사도 그중에 하나다.  지금 해인사를 보면 모든 전각이 다 새것이다. 그만큼 화재가 여러 번 있었고, 남아 있는 전각이 없다는 것은 때마다 큰불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숙종 21년(1695)에 실화로 동우제료, 만월당, 원음 등의 건물이 불타서 없어졌고, 불과 그다음 해에 또 불이 나서 서우제료와 무설전 등의 전각이 타버렸다. 영조 때도 불이 두 번이나 난다. 그리고 정조 4년(1780)에 한 번, 순조 17년(1817)에는 아예 전각의 태반이 불에 타 없어졌다. 고종 8년(1871)에 난 불은 법성료를 태웠다. 물론 여기에 언급된 전각들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이 불들로 해인사의 전각들은 다 새것이 됐다. 해인사가 법보사찰의 깊은 맛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불의 원인은 대부분 실화다. 작은 불을 잘못 다루다가 큰불로 옮겨갔다. 인간의 실수를 두고 왜 그렇게 됐느냐고 이유를 따지는 것은 쓸모없다. 하지만 이렇게 잦은 불로 모든 것들이 싹 타버렸는데, 장경판전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아울러 목재로 된 대장경판이 어떻게 오랜 세월 동안 뒤틀리지 않고 썩지도 않으면서 보관될 수 있었는지도 살펴볼 만한 문제가 된다.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살펴야 하는 것은 옛 과학의 우수성을 밝힌다기보다는,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를 만든 근대의 과학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돕지 못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시점에서, 서구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의 파괴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다. 

 

해인사의 세 가지 바람길

먼저 장경판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부터 살펴보자. 화엄종찰인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었다. 아마 처음 지었던 당시에 장경판전은 없었던 걸로 짐작한다. 그 후 의상을 효시로 하는 신라 화엄학이 남악과 북악으로 갈리면서 정치적 입장도 갈라진다. 남악을 대표하는 관혜는 화엄사를 근거로, 북악을 대표하는 희랑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남악은 견훤을 도왔고 북악은 왕건을 도왔는데, 왕건은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930년 해인사를 지원해 크게 불사를 일으킨다. 

<해인사장인경발문>을 보면 이때 대장경 인쇄본을 보관하는 고탑(古塔)을 다시 지었다는 기사가 나오는 걸로 봐서, 적어도 인쇄본을 보관하는 건물이 지금 자리, 아니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대장경 인쇄본이 어느 대장경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전의 일이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6년 전의 일이다. 

옛 동아시아에서 대장경의 간행과 국력은 비례한다. 지금은 어디서 우주왕복선을 개발하고 첨단의 기술력을 가졌는지가 국력의 우위를 말해주지만, 당시에는 보유하고 있는 대장경의 수준이 그 나라의 국력을 증명했다. 어느 정도였느냐면, 전쟁의 기술보다 더 중요했다고 짐작되고, 어쩌면 그 자체로 전쟁의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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