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든 사람들
상태바
[새기고 염원하다,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을 만든 사람들
  • 최연주
  • 승인 2022.09.28 1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장경 왜·어디서·누가 만들었을까?
이규보 문집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2 ‘신해세고려국분사대장도감봉칙조조(辛亥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雕造)’라는 기록으로 문집이 진주의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진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왜 판각했을까

팔만대장경 판각은 13세기 중엽 몽골군 침공과 관련 깊다. 1206년 칭기즈칸이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를 건국한 직후, 중국은 물론 만주·서역, 그리고 동유럽까지 정복해 대제국을 건설했다. 고려와 인접한 요(遼)·금(金)나라도 멸망시켰다. 

그 과정에서 거란의 잔존 세력인 금산(金山)·금시(金始) 왕자가 이끄는 군대가 몽골에 쫓겨 고려 영토에 들어왔다. 1216년 고종 3년 12월 의주-해주-철원까지 진출했고, 이듬해 7월 김취려에 의해 충주 박달현에서 저지당하자 동계(東界)를 넘어 여진 지역으로 물러갔다. 다시 침입해 오자 고종 5년 8월 강동성(지금의 평양 부근)에서 고려와 몽골, 그리고 동진(東眞) 연합군이 대응해 물리쳤다. 거란 군대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이 이뤄졌고, 이어 형제맹약(兄弟盟約)을 맺었다. 

고종 8년 8월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 와 횡포를 부리다가, 고종 11년 11월 저고여 등 10인이 귀국 도중 함신진(지금의 의주)에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골은 고려를 의심해 외교 관계를 끊었는데, 대규모 출병을 알리는 의사표시였다.

고종 18년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몽골군은 첫 침공 이후 고종 46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논의가 진행될 때까지 수시로 침공해 왔다. 몽골은 동선을 달리하며 침공해 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러 우리 국토를 짓밟았다. 고종 19년에는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이듬해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丈六尊像) 등이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고려는 불법(佛法)의 힘을 빌려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 판각에 착수하게 됐다. 이는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는 불상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에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남김없이 태워 버렸습니다”라며 대장경 판각 착수 배경 중 하나가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소위 초조대장경의 소실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초조대장경의 판각 배경이 1011년 현종 2년 거란군 침입에 따른 격퇴와 연관돼 있음을 밝히고, 이번에도 대장경을 판각한다면 몽골군이 물러갈 것이라 믿었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대장경 판각을 호국사업으로 인식하면서 부처의 힘으로 몽골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