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
상태바
[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전등사 회주 장윤 스님
  • 김남수
  • 승인 2022.08.30 14: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화에서 나는 호박고구마와
떡국 먹어보셨어요?”

전등사는 정족산성이다. 산성 안에 사찰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등사 자체가 산성이다. 여느 사찰이면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진입하지만, 전등사는 성문이 일주문을 대신한다. 그만큼 강화도 내에 벌어진 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1966년, 열댓 살 넘은 스님 두 명이 깜깜한 밤에 전등사를 방문한다. 절에 부탁해 허기진 배를 주먹밥 하나로 버텼다. 아침 공양이 시작되기 전 대웅전 앞마당을 빗자루로 쓸며, 주지 스님으로부터 용돈을 얻었다. 그 돈으로 마지막 순례지였던 보문사를 참배하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었다.

장윤 스님의 전등사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다시 인연이 맺어진 것은 1980년 10.27 법난 직후다. 노스님이었던 서운 스님과 함께 신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당시 동화사 재무 소임을 맡으며 노스님을 시봉할 때였다. 신군부는 동화사를 샅샅이 뒤졌으나 특별히 나올 게 없었다. 

서운 스님이 먼저 나갈 때 “나는 장윤 스님 없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가요”하여, 조사실을 벗어났다. 서운 스님은 동화사를 떠나 전등사로 향했고, 장윤 스님은 1985년 11월부터 전등사 주지 소임을 맡기 시작했다. 그 후 40년 조금 모자란 시간을 전등사와 함께했다. 

“1980~1990년대만 하더라도 수학여행에, 소풍하러 오는 학생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일이었어요. 화장실 청소하고, 먹고 남은 도시락 치우는 게 일이었죠. 당시는 상수도가 개설되지 않았을 때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성문을 닫아 버렸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어요. 강화군수가 배수구로 들어와 싹싹 빌면서 상하수도가 해결됐습니다.”

그런 시절이었다. 한창일 때는 연인원 100만 명이 전등사를 찾았다. 요즘 강화도는 가볍게 오갈 수 있는 곳이 됐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 시절 강화도를 찾는 사람은 무조건 전등사를 방문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