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의 단군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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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강화도의 단군 유적
  • 김성환
  • 승인 2022.08.3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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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하늘에 제사를 올리다
서해 바다로 완만하게 흐르는 마니산의 화강암 능선을 보고 있노라면 옛 어른들이 저 산 위에 제단을 쌓아 제를 올린 까닭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강화도에는 우리 역사의 시조인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참성단(塹城壇, 塹星壇)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 있다. 강화도에 단군 유적이 있게 된 연유를 고려의 강화도 천도와 관련해 살펴보자. 

 

참성단 제사의 유래와 단군 

조선 전기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에는 참성단을 단군이 하늘에 제사(제천·祭天)하던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전한다”는 세전(世傳)에 근거를 두기에, ‘단군 제천’의 전통을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엔 다소 주저된다.

권근(權近, 1352~1409)이 지은 「참성초청사(塹城醮靑詞)」에서는 이런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해 준다. 「참성초청사」는 참성단을 단군에 대한 제사가 아닌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천단(祭天壇)’으로 밝힌, 현재까지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제천의 전통이 단군부터 시작돼 성조(聖祖)인 고려 태조를 거쳐 후대 국왕에게까지 이어졌으며,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로 천도해서도 이어진 역사적인 전통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참성초청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동하면서 조선의 성리학 이념을 마련한 권근이 국왕을 대신해 지어 참성단 제사에 사용한 제문이다. 고려 왕조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1384년(우왕 10) 가을 참성단 제사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우왕 10년은 왜구(倭寇)가 전국 해안을 횡행하며 도읍인 개경 부근까지 약탈을 일삼던 때로, 제사의 목적은 왜구의 침입을 물리치려는 것이었고 제주(祭主・제사장)는 국왕이었다. 

참성단 제사는 도교 의례로 치러졌기에 유교에서 쓰는 제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초례(醮禮) 또는 초제(醮祭)라 불렀다. 참성단 제사의 원래 이름은 ‘참성초’, 또는 참성단이 위치한 마리산(마니산)을 앞에 붙여 ‘마리(니)산 참성초’라고 했다. ‘청사(靑詞)’라는 것은 도교 의례에서 사용되는 제문 같은 것으로, 푸른색의 종이에 제문을 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참성초청사」는 마리산 참성단에서 지냈던 도교 제사에 사용됐던 제문으로, 그 명칭에 참성단의 성격과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초제의 유래를 ‘단군유사(檀君攸祀)’, 즉 “단군이 제사하던 것”에서 찾고 있다. 즉 참성단은 단군을 제사하던 곳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단군은 제사를 주관했던 제주였던 것이다. 단군을 제사하던 평양의 단군 사당인 숭령전(崇靈殿),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강화도 참성단에서의 제천은 몽골 침입으로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후 시작됐다. 고려 전기에 궁궐 이외의 지역에서 지낸 제천은 서해도 염주(황해도 연백)의 전성 제천단에서 이뤄졌었는데, 이것이 마리산 참성단으로 옮겨진 것으로 짐작한다. 전성에서도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이 직접 제천했을 가능성이 있고,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은 관료를 파견해 초제를 지낸 적이 있다.

 

 

참성단에서 지낸 삼계대초(三界大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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