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여몽항쟁기 강화도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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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깃든 고려왕조, 강화도] 여몽항쟁기 강화도 천도
  • 김경표
  • 승인 2022.08.3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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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람들,
강화도로 옮기다
『경기부 충청도 지도(京畿府忠淸道 地圖)』의 개성과 강화도 부근, 조선 후기, 수원박물관 소장

강화도 강화읍 고려산 중턱에 있는 ‘강화 홍릉’은 고려 제23대 고종(高宗, 1192~1259)의 왕릉이다. 안내판 없이는 임금의 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초라한 규모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금속활자기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려청자,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인 팔만대장경 등 화려한 고려시대 문화를 떠올려보면 홍릉의 규모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게다가 고려의 수도 개경 부근이 아닌 강화도에 무슨 연유로 고려 임금의 능이 있는 것일까? 800년 전 고려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위한 천도였나?

1231년(고종 18) 8월 몽골의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은 고려 내 친몽세력(親蒙勢力)인 홍복원(洪福源, 1206~1258)을 앞세워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 국경 지역인 북계(北界, 현 평안도 일대)의 여러 성이 삽시간에 함락됐고, 귀주성(龜州城, 현 평안북도 구성시)과 자주성(慈州城, 현 평안남도 순천군)만이 항전을 이어 나갔다. 몽골군은 이들 성을 포위하고 본대는 빠르게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고려는 삼군을 동원해 막으려 했으나, 연이어 몽골군에게 패배하면서 순식간에 개경까지 압박받았다. 결국 12월 몽골과 화친을 맺었고, 몽골군은 북계 지역에 다루가치[達魯花赤, 점령지 파견 관리]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했다. 

고려는 1170년(명종 1)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에 의한 무신정변 이후 100여 년간 무신정권 시대를 맞이했다. 정중부에 이어 경대승(慶大升, 1154~1183), 이의민(李義旼, ?~1196)으로 이어진 무신 권력은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이 집권한 이래로 최우(崔瑀, ?~1249), 최항(崔沆, ?~1257), 최의(崔竩, ?~1258)까지 최씨 4대가 60여 년간 집권했다. 1231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 집권기였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최우는 대몽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할 것을 결정하고 서둘러 천도를 감행한다. 

왕이 수도 개경(開京)에서 출발하여 승천부(昇天府, 현 개성 개풍군)에 머물렀다. 다음 날 강화도의 객관에 들어갔다. 이때 장마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흙탕물이 정강이까지 차고,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고위 관리와 양가의 부녀자 중에 심지어 맨발로 지고 이고 가는 사람까지 있었다. 의지할 곳 없이 울부짖는 백성들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위 내용은 『고려사절요』에 묘사된 강화도 천도 모습이다. 강화도 천도가 결정된 것이 1232년(고종 19) 6월 중순이었는데,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실행하면서 장맛비에 아수라장이 된 풍경을 기록한 것이다.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다급하게 천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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