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빚은 수행터 부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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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빚은 수행터 부석사
  • 노승대
  • 승인 2022.08.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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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부석사(浮石寺)! 갈 때마다 느끼는 맛이 다르고 새로운 감회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절. 계절따라 각기 다른 옷을 갈아입으니 풍광이 다르고 감흥이 다르다. 낙엽지는 가을,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을 때 붉은 사과밭 사이 곧게 뻗은 은행나무 길. 우수수 떨어지는 노란잎을 밟으며 마음 모아 계단길을 오르고 올라 무량수전 앞마당에 서면 아~, 일망무제로 펼쳐진 산하. 산 뒤에 산, 그 산 뒤에 산이 겹겹이 쌓이고 하늘 노을빛이 단풍 숲 사이로 사그라질 때 은은히 울리는 범종소리. 빛과 소리와 어둠이 우리를 흔들어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생각게 한다. 오호, 하늘이 빚은 수행터로구나.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해가 670년, 양양 낙산사를 비롯해 전국을 다니다가 6년 뒤 소백산 자락에서 결국 이 자리를 점 찍고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500여 명의 이교도가 기도터로 삼고 버티고 있었다. 순순히 물러갈 리 없는 상황, 당나라에서부터 의상대사를 받들다 죽은 선묘낭자가 신통력을 나타내 허공 중에 바위를 띄우니 이교도는 결국 항복하고 물러났다. 이 전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기록이 없고 오히려 중국 『송고승전』에 실려 있으니 중국에서 화엄종의 대가인 의상 스님을 존숭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았으면 스승인 지엄대사의 법을 이어받았으리라. 18세 연하이며 스승의 법을 이은 현수 법장 스님이 의상대사에게 공손하게 써 보낸 편지의 내용을 읽어봐도 그렇다. 이런 점은 일본불교에서도 마찬가지, 의상대사와 원효대사를 가장 존경했고 두 스님의 고사를 그린 《화엄연기》에는 두 스님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남겨져 있다. 물론 두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 가려다가 무덤 속에 들어가 해골물을 마시게 된 이야기도 그 안에 실려 있다. 심지어 선묘낭자의 조각상을 모신 선묘사 사찰도 있었지만 지금은 조각상만 교토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어쨌든 부석사는 창건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역사와 전설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고 한국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법당 5곳 중 2곳이 이 부석사에 있으니 갈 때마다 모르는 역사를 알게 되고 문화재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국보 5점과 보물 6점 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니 당연히 부석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일직선 은행 숲길이 거의 끝날 무렵, 왼쪽으로 늘씬한 신라시대 당간지주가 나타난다. 가운데 세운 나무 기둥 위에는 화엄종 종갓집의 깃발이 휘날렸으리라.

 

신라식 석축 사이 계단 길을 오르면 일주문이 있었던 천왕문이다. 천왕문, 일주문이 조선시대 유행했으니 그전에는 일본 사찰처럼 금강역사가 있었겠지.

 

천왕문을 지나면 가파른 계단길이 나타난다. 경사진 산세 그대로 절을 앉혔으니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래, 나도 자연인이다.

 

계단을 올라와 회전문을 들어서면 높다란 누각형태의 종각이 정면에 서 있다. 팔작지붕의 측면 지붕선이 경쾌하고 누각의 기둥들이 굵직하다. 든든하다.

 

종각 누각 밑을 통과하면 왼쪽 신라식 대석단 앞쪽에 너른 공터가 있다. 큰 법당이 있던 곳으로 문경 대승사 대웅전 목각탱이 여기에 있었던 유물이다.

 

종각을 옆에서 보면 앞쪽은 팔작이고 뒤쪽은 맞배지붕인 기이한 형태다. 법당에 오르는 사람의 시선을 막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 나온 선조들의 지혜다.

 

이제 직선행로에서 방향을 약간 바꾸어 안양루로 향하게 되어있다. 누각 밑으로 계단에 올라서면 무량수전 정면이 된다. 계속 직선이면 무척 지루했겠지.

 

안양루 정면의 부석사, 안양문 현판. 안양은 극락의 다른 말이다. 부석사 글씨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부석사를 방문했을 때 남긴 글씨다. 명필이다.

 

안양루 밑에서 올라오면 단정한 석등이 맞이한다. 탑은 없다. 아미타불을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르니 열반에 들지 않고 일체중생을 구제하기에 탑을 안 세운다.

 

석등의 화창 사이 보살상. 고개가 약간 갸웃하고 연꽃인지 과일인지 무언가를 왼손으로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살짝 대었다.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1376년에 고쳐 지은 무량수전. 고려시대 건물이지만 팔작지붕으로 했고 그 시대의 양식을 다 볼 수 있는 귀한 건물이다. 현판은 공민왕 글씨라 한다.

 

무량수전 기단부의 계단들. 전형적인 신라양식임을 금방 알겠다. 소맷돌을 사선으로 처리하고 앞쪽은 수평으로 마감, 옆면은 2중 삼각으로 면석을 파냈다.

 

여름이라 여닫이문 3짝을 모두 연 채 들어열개문은 조금씩만 열고 막대기로 받쳐 놓았다. 수평으로 들어 올려 걸쇠에 고정하면 법당 내부도 시원하겠지.

 

무량수전은 측면이 넓다 보니 내부에 높은 기둥을 2열로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게 했다. 자동으로 서쪽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은 동쪽을 바라보게 됐다.

 

무량수전 뒤엔 선묘룡이 공중에 띄웠다는 부석(浮石)이 가로로 누워있다. 그 뒤로 높고 긴 석벽이 부석사를 감싸고 있다. 정말로 오묘하고 기이한 터다.

 

무량수전 앞 돌배나무 옆에 서면 온 산하가 겹겹이 내려다보인다. 높지도 않은 절인데 어찌 이런 풍광이 연출될까? 유일무이의 절 자리요 명당이다.

 

무량수전 오른쪽의 선묘각이다. 선묘낭자는 의상대사가 귀국하자 용이 되어 의상대사를 보호하겠다고 바다에 투신했다. 안에 낭자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를 모신 전각으로 1377년에 지어졌다. 고려시대 사천왕 벽화가 남아있어 국보로 지정하고 따로 보관했다. 전설의 선비화도 볼거리다.

 

부석사는 소백산의 한 줄기인 봉황산자락에 있다. 계곡도 없고 깊은 숲도 없다. 그러나 식사용정(食沙龍井) 샘이 있어 기도터가 됐다. 기우제도 지냈다.

 

지장전 뒤에는 선묘정도 있다. 의상대사가 머물 때 선녀가 내려와 아침저녁 대사에게 물을 올렸다 한다. 식사용정과 함께 1,300여 년의 역사가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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