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는 영축산이다. 원래 인도의 영축산은 부처님이 경을 설하셨던 곳이라 그 의미가 깊은데, 통도사의 산이 그와 닮아 영축산으로 불린다. 영축산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 스님이 주석하면서 법문을 펼치던 때다. 살아생전 스님의 법문이 펼쳐진 1925년 극락암에서 『화엄경』을 설한 시기부터, 특히 ‘화엄산림법회’가 대대적으로 펼쳐진(큰절에서 동짓달 한 달 동안 『화엄경』 설법이 펼쳐진) 1970년부터 입적한 1980년대까지 한국불교는 영축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영축산 도인’이란 칭호로 압축해 경봉 스님을 불렀다.
인생의 4대 의혹과 한학
경봉 스님에게 『화엄경』은 수행의 요체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경이었기에 사부대중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화엄의 세계를 알리고 가르쳤다. 그의 깨침도 화엄산림법회 기간에 성취했다. 낮에는 법사로 무량수각에서 『화엄경』을 강설하고 밤에는 스님의 처소였던 삼소굴(三笑窟)에서 정진하는 도중이었다. 어느 날(1927년 11월 20일) 새벽, 방 안에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는 순간 화두를 타파했다.
스님은 활연대오(豁然大悟, 마음이 활짝 열리듯 크게 깨달음)하기까지 4가지 의혹을 품고 다녔는데, 이른바 ‘인생의 4대 의혹’이라 칭했다. 즉 ①내가 나를 모르고(이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②자기의 소소영령(昭昭靈靈, 한없이 밝고 신령함)한 것이 어느 곳에 있다가 부모 태중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③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④죽는 날이 언제인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인공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한세상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참된 주인공을 찾을 때까지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이리하다가 죽은들 어떠하리”라는 독백이 그의 일기에 나온다. 스님의 출가 계기는 모친의 죽음이었다. 그러니 스님의 4대 의혹은 자연히 인생무상의 근원인 죽음을 뚫는 데 간절한 기제로 작용했으리라. 스님은 15세 때 겪은 모친상의 슬픔으로 1년 뒤 통도사로 출가했다. 그렇게 청년 김용국은 16세 때 ‘영축산 도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스님은 경남 밀양 부내면(현재의 밀양 시내) 출신이다. 어릴 때 『사서삼경』과 『명심보감』 등 한학을 사사해 한문 실력이 출중했고, 이는 스님이 경을 해석하고 글을 쓰고 시를 짓고 외부 인사와 교류하는 근간이 됐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국권을 강탈한 일본에 저항한 장지연은 마산 포교당에서 경봉 스님의 법문을 듣고 교류를 하면서 여러 글에서 스님을 칭송했다.
“단아한 성품, 계행이 철저하여 승속을 막론한 추앙의 대상, 해박한 학식, 출중한 한문 실력으로 시를 잘 짓고 글을 잘 쓰며, 포교당에서 스님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며, 본인(장지연)도 스님의 “법석에 임하여 법문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다”라고 밝혔다.
26세의 젊은 선승과 55세의 지식인과의 만남이었다. 비록 나이 차가 있었지만, 스님을 향한 장지연의 존경은 극진했다. 특히 장지연의 글에서 “젊은 스님의 해박한 학식과 출중한 한문 실력”은 여러 곳에서 강조됐다. 경봉 스님의 한학과 연계된 묘한 인연은 법맥에서도 드러난다. 상좌 벽안의 출가 전 훈장 이력과 손상좌 지안의 속가 부친이 서당 훈장이었던 배경은, 세 사람 모두 어린 시절 한학을 사사한 공통의 요소를 보여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원조의 품격
경봉 스님의 법문은 당신만의 체화된 것이기에 가장 한국적인 선승 법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스님은 요즘 일상어로 표현하자면, 사통팔방(四通八方, 이리저리 길이 통함) 전천후 스님이자 다중작업(멀티태스킹)이 가능한 선사였다. 스님의 담백한 성품처럼 법문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고, 특히 직업과 학력에 차등이 없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풀어 각자의 그릇에 맞게 설법했다. 그러니 모든 사람에게 의지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때 한국 사회를 풍미했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는 성철 스님 이전에 경봉 스님이 내원사에서 한 법문이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삼십 년 전엔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천성산에 들어오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십 년 전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 아니요, 물도 물이 아니더라.’ 오늘 마음과 부처엔 관심 없이 떡과 밥을 배불리 먹고 천성산을 바라보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더라.’ 이 셋 가운데 정말 어떤 것이 옳은가?”
스님이 주석한 극락암은 스님의 법문 한마디라도 듣고자 하는 사부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수좌들은 극락암에서 스님의 지도를 희망했다. 자연히 제방 선객의 극락암 방부(房付, 선방에 안거를 청하는 것) 경쟁은 치열했고, 방부를 들이고도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마치 로또 당첨의 행운과 같았다. 극락암에 오지 못한 수좌들은 편지로 스님께 공부를 점검받았다. 그 편지들에서 짧고 명쾌한 스님의 답변은 상대방에게 무릎을 ‘탁’ 치게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이 가운데 수덕사 문중의 정혜사 대중이 “나에게 한 물건이 있어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되 거두어 얻을 수 없다 하니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스님은 “나라고 하는 그 나를 참으로 아는가/ 모르는가/ 괴롭도다. 야반삼경에 발바닥이나 들여다보게나”라며 정진에 박차를 가해 공부하면 자연히 알게 된다고 답했다.
특히 서산대사의 오도송에 관한 답변은 스님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대표적인 설법이다. 용주사 대중이 <서산대사의 오도송> 중에 “고기에 뿔이 돋았다는 표현은 무언(無言)을 뜻하는가?”라고 질문한 일이 있다. 그러자 스님은 “몇 군데나 이렇게 보냈던지/ 일구(一句) 도리를 해결하지 못했구나/ 고인들이 씹던 찌개미(찌꺼기)를 탐하지 말라 / 보검으로는 송장을 베지 않노라”라며, 타인의 법미(法味, 진리의 본질)를 흉내 내지 말고(고인이 씹던 찌개미를 탐하지 말고) 본인이 직접 체험한 살아 있는 자신의 언어로, 본인이 주인공인 삶을 살도록 충고했다. ‘보검으로는 송장을 베지 않는다’라는 지적은 저절로 숙연해지는 참 도리가 아닌가.
스스로 해결한 사바의 근심들
경봉 스님은 ‘영축산 도인’인 동시에 바늘 틈 하나 허용하지 않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사중 물품에 대한 스님의 신중함은 구두쇠 노인네를 연발할 정도였다. 스님은 평소에 “한 낱의 쌀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나의 살점이 떨어진 것과 같이 여기고, 한 방울의 간장이 땅에 떨어지면 나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 생각하라”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지냈다.
양념통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산내 암자에 있던 비구니들이 스님을 친견한 후 점심공양 때가 되어, 스님의 공양준비를 해 드리고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막상 나물이라도 무치려 하니 공양간에 고춧가루, 깨소금, 참기름, 들기름 등 그 어떤 양념통도 없었다. 알고 보니, 그 모든 양념통은 스님 당신 방 벽장에 넣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스님의 성품을 단박에 드러낸다.
“저놈(비구)들에게 맡겨놓으니 일주일 동안 쓸 참기름을 이틀 만에 다 처먹어버렸다. 그래가지고 절 살림 우째 살겠노? 그러니 이 귀한 양념들 저놈들한테 맡겨놨다간 큰일난다, 마.”
그래서 스님은 점심공양을 준비하려는 비구니들에게 “고춧가루, 깨소금 조금만 넣고 참기름도 한 방울만 쳐라”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다. 양념통까지 지키며 절약하는 스님의 모습은 맏상좌인 벽안 스님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하지만 절약 정신이 투철한 경봉 스님마저 상좌 벽안의 공평무사함이 너무 지나치다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그 인품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스님이 모두를 다 아꼈던 것은 아니다. 상좌 벽안이 통도사 주지를 살 때,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만큼은 성심을 다하도록 강조했는데, 사시마지에는 절대 보리쌀은 섞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그 이유는 “보리는 기를 때 인분을 줘서 자라게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성심마지(誠心摩旨)에는 보리쌀을 넣지 않았으니 법당 불전 사시마지를 공양주에게 단속하여 성의 있게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절약은 무조건적이지 않고, 상황에 따른 시의적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못 찾겠다 꾀꼬리’ 노래가 나온 배경이 됐던 조용필에게 준 화두 등 스님의 중생제도는 그야말로 광범위했다. 법회에 모인 사람을 직접 제도하기도 했지만, 특정 대중에게 중생제도의 특명을 부여하는 방편을 쓰기도 했다. 60년대 초 극락암에 자주 오는 30대 보살(극락심)이 있었다. 그녀는 전국 각지를 돌며 이불 장사를 하는 보살이었는데, 스님은 이 보살을 처음 보자마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스님의 통찰력은 이미 전국에 소문나 있었다. 방문객에 대한 설명 없이도 그 사람의 직업 및 온 이유마저 꿰뚫었고, 상대방의 미래에 대한 예측은 정확했다.
스님은 보살에게 “보살은 지장보살이 돼야 한데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도와줘야 한데이” 하며 앞으로 보살의 고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고 했다. 당시에 폐병 환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에이즈(HIV) 환자처럼 취급받았다. 극락심 보살은 스님 말씀대로 전국을 떠돌다가 버림받은 폐병 환자들을 만나면, 극락암으로 데리고 왔다. 그러면 피를 토하는 환자를 스님은 3년 동안 생식으로 몸을 다스리게 한 후, 4년째에는 도시 보신탕 가게로 데리고 가 그것을 먹여 건강을 되찾게 해주었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만, 도(道, 진리)의 관점에서는 일상의 도리에 지나지 않은 일이다. 스님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출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님은 개인의 수행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제도 개혁을 위한 교단 혁신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혁신단체를 대표하는 불교혁신총연맹의 위원장이 되어 일제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는 운동을 시도했고, 해방 후 농지개혁법의 공포로 사찰재산의 변동과 관련 대처와 비구 승단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대처승단을 설득함으로써 무혈증여를 받아냈다. 통도사가 다른 총림과 달리 토지가 많은 이유는 경봉 스님의 노력으로 유일하게 물리적 갈등 없이 대처승단으로부터 증여받았기 때문이다.
경봉 스님이 67년 동안(18세부터 85세까지) 쓴 <삼소굴 일지>의 생애 마지막 기록이 ‘오늘은 내 힘으로 변을 보다[今日自力大便]’라는 여섯 글자의 한자이다. 스님은 소변소는 휴급소(休急所, 급한 것을 쉬어가는 곳)라 하고, 대변소는 해우소(解憂所, 근심을 해결하는 곳)라 했는데, 그야말로 사바의 모든 근심은 당신 스스로 다 해결하고 떠나신 것이다.
효신 스님
조계종 교육아사리. 철학과 국어학, 불교를 전공했으며 인문학을 통한 경전 풀어쓰기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