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문종 태실수호사찰 예천 명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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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문종 태실수호사찰 예천 명봉사
  • 노승대
  • 승인 2022.07.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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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우리 민족은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좋은 자리에 묻는 풍습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태를 통해 생명이 태어났기에 아이의 수명과 복덕도 그 태를 통해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김유신의 태를 묻은 진천 태령봉이 그 예다. 태를 묻었던 태실(胎室) 터가 지금도 그 봉우리에 있다.

고려나 조선에서도 왕의 자손이 태어나면 좋은 자리를 태봉으로 정하고 태실을 만들었다. 태실은 아이의 건강과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여겨 정성을 들였다. 관리를 내려보내 태실 공사가 끝나면 고위직인 당상관을 안태사(安胎使)로 정해 태를 봉송하도록 했다. 물론 태실 주위에는 금표(禁標)를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 일체 행위를 금지했다.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비석 등을 새로 설치했다. 수호하는 군사도 2명에서 8명으로 늘렸다. 이를 태실가봉(胎室加封)이라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태실은 전국에 약 300여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총독부에서 태실과 분묘의 훼손을 막고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929년부터 태실과 왕자, 왕녀, 후궁들의 분묘를 파헤쳐 서울 서삼릉으로 이장했다. 그래서 서삼릉에는 태실 54기, 분묘 45기가 공동묘지처럼 들어섰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왕이 죽으면 왕릉 근처에 능침사찰을 뒀다. 사찰로서는 선왕의 진영이나 위패를 모시고 있으니 유생들의 횡포도 막을 수 있었다. 봉은사, 봉선사, 봉국사, 신륵사, 용주사가 대표적이다. 보통 왕릉수호사찰이라 불렀는데 태실수호사찰도 있었다. 태실을 만들고 인근 사찰이 태실수호사찰이 되면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기에 사찰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정종의 태실이 있는 김천 직지사, 인종 태실인 은해사 백흥암, 문효세자 태실인 예천 용문사와 세종의 18왕자와 단종의 태실이 있는 성주 선석산 태봉 옆의 선석사가 대표적이다. 예천 명봉사에는 문종과 사도세자 두 사람의 태실이 있으니 이 또한 명당으로 고른 곳이다.

 

명봉사로 가는 길에 들린 단양8경의 하나인 사인암이다. 고려시대 우탁 선생이 사인(舍人)벼슬 때 이곳에 머문 인연이 있어 사인암으로 부르게 됐다.

사인암 암벽 사이 계단 위에는 삼성각이 있다. 절묘한 기도 터로 산신각이었으나 삼성각으로 문패가 바뀌었다. 암벽에는 수많은 각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틈 작은 공간에도 갖다 놓은 동자상이 있고 수직 암벽에 붙여 놓은 동전도 보인다. 과거에 붙든 시험에 붙든 붙으면 좋다는 믿음이 일반화된 현상일까?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_우탁 <탄로가(嘆老歌)>

 

우탁의 시조가 새겨진 바위 옆 암벽에는 알 수 없는 각자도 있다. 무슨 뜻일까? 청련암이 1954년 사인암 옆으로 이전하면서 모시고 온 대세지보살상.

 

명봉사 입구에는 수문장 격인 전나무 한 그루가 솟아있다. 가슴둘레 4.3m, 높이 33.5m에 이른다. 전국 최장신 전나무다. 두 그루 중 하나만 남았다.

 

해발 500m 높이에 있는 명봉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시대에도 두 번이나 불에 타고 중건했는데 한국전쟁으로 암자들과 함께 모두 타버렸다.

 

1955년경 다시 중건해 오늘에 이르렀다. 오른쪽 대세지보살상은 전쟁 중에도 살아남았다. 촛대, 향로, 다기는 아원공방 작품이다.

 

1927년 문종과 사도세자의 태실을 파헤치고 파손한 후 두 곳의 태실비는 명봉사 스님들이 경내로 옮겼다. 하지만 사도세자 태실비를 사적비로 썼다.

 

2012년 두 곳의 태실지를 조사하고 나온 파손된 석물을 법당 옆에 모아뒀다. 2016년 두 곳 태실을 복원하며 문종대왕 태실비는 제자리로 갔다.

 

사도세자 태실비의 비석은 글씨를 지우고 사적비로 썼기 때문에 거북이 귀부만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당에 있는 승탑의 일부. 누구의 승탑이었을까?

 

명봉사에 있는 자적선사(882~939)의 능운탑비. 고려 태조의 명으로 941년에 세운 비이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여주 고달선원의 맥을 이었다.

 

비문은 신라에서 왕건에게로 간 최언위가 지었고 글자는 구양순의 글씨를 집자했다. 이두문으로 돼 있어 당시 이두의 용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복원된 문종대왕 태실은 명봉사 법당 바로 뒤 봉우리에 있다. 명봉사가 다 내려다 보인다. 옛날 절터가 다 명당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태실이다.

 

문종대왕태실이라고 쓰여 있는 비석은 1735년에 세웠다. 왕위에 올라갔을 때 가봉을 하면 주상전하태실이라 했을 것이다. 문종은 죽고 난 뒤 받은 묘호다.

 

사도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일하게 가봉된 태실이다. 정조의 효심이다. 경모궁(사도세자 사당)태실이라 쓰여 있는 비석은 새로 만든 것이다.

 

1785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태실가봉을 마치고 그 공사내역을 기록한 각석이다(예천 명봉리 경모궁태실 감역 각석문). 감독관 풍기군수 이대영.

 

그는 감역이 끝난 후 통정대부로 올라갔다. 봉산 표석은 나무의 벌채를 금지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다. 원래 표석은 민가의 돌탁자가 돼 다시 세웠다.

 

예천읍의 개심사지 오층석탑은 고려 초인 1010년에 세워진 탑으로 12지신상, 팔부신중, 금강역사가 함께 나타났다. 논 가운데 있더니 논은 없어졌다.

 

중앙고속도로 하행선의 단양휴게소. 숲사이로 산책길도 있고 벤치도 있다. 현곡리 고려고분도 있다. 상행선 단양휴게소에서는 적성비(국보)로도 갈 수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2022)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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