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_카라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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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_카라바조
  • 보일 스님
  • 승인 2022.08.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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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오타비오 레오니의 <카라바조 초상화>(1621년경)

삶은 이중적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삶 속에는 자랑스러운 성취만큼이나 작지 않은 실수와 과오가 중첩된다. 때로는 그 과오가 삶 전체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기도 하고, 그 과오로 인해 죄책감으로 그늘진 하루하루를 살기도 한다. 그 와중에 그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고도 해보고, 타협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번번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신을 다시 어두운 뒷골목으로 끌고 들어가기 일쑤이다. 그 순간 예술은 그런 인간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고, 새로운 상상과 성찰을 통해 전혀 다른 시점에서 세상을 보게 만들어준다. 가령 오직 신만을 향한 시선을 거두고, 인간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전환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냥 신 앞에 엎드려 빌면서 심판과 단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참회하고 과거와 결별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그렇게 예술은 그 행위 자체로 누군가에게는 삶의 구원이 되기도 하고, 또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여기 자기 작품을 반성문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단죄하려 한 남자가 있다.

 

병든 바쿠스 혹은 카라바조

그 남자는 바로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이다. 그의 이름부터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미켈란젤로 부에나로티와 같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뒤에 붙은 ‘다 카라바조’는 카라바조 지역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카라바조는 그가 태어난 아니 정확히는 페스트 때문에 잠시 피신한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아마도 카라바조 생전에 미켈란젤로와의 경쟁을 의식한 듯한 그의 기법들은 이 이름에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카라바조’라는 이름은 미술사에 문외한이었던 필자로서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아마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를 통해서 카라바조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 도입부에서 루브르 박물관 관장 자크 소니에르가 괴한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다가 전시돼있던 카라바조의 그림을 벽에서 떨어질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그 그림이 뒤로 넘어진 소니에르를 덮쳤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그저 유명한 화가려니 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전시된 <병든 바쿠스>(1593~1594)를 직접 보고서야 비로소 카라바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 속에는 팽팽한 긴장과 불안이 묻어난다. 특히 이 <병든 바쿠스>라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안과 위태로움에 대한 묘사는 가히 독보적이다. 그림 속 바쿠스는 병색 짙은 얼굴색을 하고 있으며, 파리하고 메마른 입술 사이로 번지는 어색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울 정도로 불안함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더러운 손으로 포도 넝쿨을 움켜쥐고 있다. 선명하게 보이는 손톱의 때는 사실적이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다. 여기에 머리 위에 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월계관이 안쓰러움을 더할 뿐이다. 그림 속 바쿠스는 병에 걸린 것이 분명한데, 악화하는지 회복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카라바조 자신을 병든 바쿠스로 묘사했다고 짐작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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