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 체크인, 템플스테이] 템플스테이 20년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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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로 체크인, 템플스테이] 템플스테이 20년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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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2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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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사찰을 변화시키다
(왼쪽부터) 금강 스님, 주경 스님, 류지호 대표

참가자. 주경 스님, 금강 스님, 류지호 대표

정리. 김남수   

사진. 유동영 

 

대한민국의 2002년은 월드컵의 해로 기억된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붉은 악마’로 변신해 응원하는 모습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편으로 미래 불교를 변화시킬 일을 도모했으니, ‘템플스테이’가 그것이다. 초창기 템플스테이를 고민했던 세 명이 수덕사 산중에 앉아, 지난 20년을 돌아보고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류지호(이하 사회) : 2002년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템플스테이가 시작됐습니다. 20주년을 맞이해 템플스테이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모색해보는 대담입니다. 주경 스님은 2002년 당시 포교원 소임을 보았고, 2004년에는 한국불교문화사업단 초창기 국장도 맡으셨습니다. 금강 스님은 해남 미황사 일선에서 꾸준하게 수련대회를 하셨습니다. 템플스테이가 진행되기까지의 과정을 먼저 듣도록 하겠습니다.

주경 스님(이하 주경) : 2001년부터 “조계종에서 월드컵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하는 이야기가 나왔고, 구체화한 것이 템플스테이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도 있었지만, 정부 차원의 의사 타진도 있었죠. ‘건강한 숙박 시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라고 하더군요, 러브호텔까지 숙박으로 고려했다고 하니깐요. 사찰에서 외국인들이 숙식하면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 그런 차원에서 템플스테이 이야기가 나왔죠. 

저는 종단 소임을 그만두고 잠시 공백이 있었는데, 조금 후에 결합하게 됐습니다. 2002년 1월에 포교원 산하에 템플스테이 사무국을 꾸리면서 일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당시 송광사 해인사로 대표되는 수련회가 있었고, 수백 명이 숙박하는 전통도 있었지만, 다른 개념이었죠. 처음에는 홈스테이와 수련의 개념을 적용해보자 했죠.

외국인들이 사찰에 머물려면 ‘숙박 시설과 화장실, 세면장 등의 편의시설과 음식에 대해서는 최소한 맞춰줘야 하지 않나?’ 하는 고민이 제일 컸던 것 같습니다. 당시만 해도 사찰에는 전통적인 재래식 화장실이었지, 양변기가 제대로 없었어요. 수도꼭지 아래에 세숫대야를 놓고 씻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제 기억에는 문화관광부에서 1억 정도 지원했었는데 그 돈을 가지고 33개 사찰에 시설지원비로 사용했죠. 

 

사회 : 월드컵 기간에 외국인들이 실제로 사찰에서 숙박했나요?

주경 : 많지 않았어요. 1,000명이 넘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 : 일선 사찰 입장은 어땠습니까?

금강 스님(이하 금강) : 월드컵 기간에 외국인들 대상으로 하긴 했지만, 외국 기자와 대사관 직원을 대상으로 팸투어(Fam Tour)를 많이 했어요.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의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았어요. 외국인 기자들이 템플스테이 팸투어를 하다 보니까 ‘이게 가장 한국적이다’라고 인식한 것이죠. 1,000년이 넘은 공간에서 지낸다고 하는 게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것 같고요. 동남아 지역과 비교해도 한국 사찰만의 내용이 있고, 훨씬 단정해 보였나 봅니다. 사찰음식을 먹고 자연과 함께하는 것도 좋아했죠. 외국인 기자들, 외국 대사관 직원들이 상당히 흥겨워했습니다. 

그즈음 수련회가 굉장히 활발했죠. 송광사부터 시작해서 해인사, 대흥사 사찰 수련회가 인기 있었습니다. 대흥사 ‘새벽 숲길’이라는 좀 편안한 프로그램이 있었고, 저는 2000년도부터 ‘어린이 한문학당’을 진행했죠.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는데, 외국인 대상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봤죠. 

한국의 사찰은 수행 공간이기도 하지만, 역사와 문화가 있기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이제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미황사는 월드컵경기장으로부터 꽤 먼 곳이었지만 자신감이 있었죠. 

 

사회 : 그즈음 주5일제가 시행됐습니다. 템플스테이가 대중화하는 데 좋은 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습니까?

주경 : 좀 더 여유가 생기고, 가족 중심의 여가 문화가 생기면서 1박 2일이 2박 3일로 늘어나고, 일주일씩 있다가 가는 사람들이 늘어났어요. 주5일제가 시작되면서 템플스테이 발전에 좋은 영향을 미쳤죠. 

금강 : 또 하나 거들자면 IMF 외환위기가 지나고 난 뒤, 고도 성장사회에서 저성장 사회로 바뀌면서, 많은 사람이 실직했던 경험도 있고 해서 마음의 문제가 많이 대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 이전까지 사찰은 스님과 신도를 위한 공간으로 인식됐습니다. 일반인들은 입장료를 내고 잠시 관람하거나, 등산할 때 살짝 지나가는 곳이었는데, 하룻밤 잠도 자보고 스님과 대화도 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 템플스테이 아닐까 합니다. 개방성 측면에서는 굉장히 호응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 금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주경 : 일부에서는 ‘밥장사 아니냐?’, ‘이제 외국인들까지 받냐?’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고 말들이 많이 있기는 했죠. 오히려 문화관광부나 당시 한국방문의해 추진위원회에서 호응을 많이 해줬습니다. 도영심 추진위원장이 열정을 갖고 도와줬고, ‘월드컵이 끝나도 계속 유지했으면 좋겠다’라는 조언도 많이 해줬습니다. 외부에서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금강 : 월드컵 이후로 확대하는 데 조심스러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70~1980대에 수학 여행객들이 사찰로 오면 밥 해먹이고 재워주고 하는 기억들이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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