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염불하는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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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염불하는 스님들
  • 조정육
  • 승인 2022.05.2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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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김홍도, 삶을 달관하다
<삼공불환도>(보물), 1801, 견본수묵담채, 418.4×133.7cm,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김홍도가 57세에 그린 8폭 병풍 그림으로 풍속화와 산수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전원의 즐거움을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다. 강을 앞에 두고 산자락에 위치한 기와집과 논밭, 손님치레 중인 주인장, 심부름하는 여인, 일하는 농부, 낚시꾼 등을 곳곳에 그려 전원생활의 한가로움과 정취를 표현했다. 

김홍도의 나이 56세 때였다. 1800년 6월 28일에 정조가 승하했다. 갑작스러운 변고였다. 어람용 그림을 전담하다시피 하면서 특별대우를 받았던 김홍도에게 정조의 승하는 매우 충격이었다.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김홍도의 삶은 급속도로 피폐해졌다. 그에게 주어졌던 특혜는 일시에 사라졌다. 그는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화원 생활을 계속했다. 60세가 되던 1804년에는 제자급 후배 화원인 박유성과 함께 규장각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국왕의 직속에 둔 화원)으로 뽑혔다. 그런가 하면 회갑이 되던 1805년에는 성적순에 따라 녹봉직을 받는 취재시험에 여러 차례 참가했다. 

그러나 차비대령화원으로 활동한 기간도 잠시였다. 오래전부터 앓았던 천식과 병환 때문에 차비대령화원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과부가 된 딸마저 병으로 위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오죽하면 외아들의 훈장댁에 보낼 월사금도 마련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회갑을 맞은 그해 겨울에 전라도 감영으로 내려갔다. 전라도에는 평소 안면이 있던 심상규(沈象奎)가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심상규가 지인에게 쓴 편지에는 김홍도가 “굶주리고 아픈 상태로 취식을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하면서 “지금 한낱 애석한 호한으로 어렵고 딱하기가 이와 같으니 동국의 타고난 재주로 가당치도 않다”고 탄식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1805년 12월 1일에 그린 그의 절필 작 <추성부도(秋聲賦圖)>에는 당시 김홍도의 심정이 절절히 묘사돼 있다. 이 시기에 스님을 그린 그림에도 만년에 그가 겪었던 비애와 쓸쓸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인생 후반기에 겪은 비애

김홍도는 20대에 ‘사능’을, 40대와 50대 중반에 ‘단원’을 호로 썼는데 50대 후반부터는 ‘단구(丹丘)’ 또는 ‘단구(丹邱)’를 주로 썼다. ‘단구’는 ‘신선이 사는 곳’을 뜻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의 심정이 반영된 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단원 늙은이’라는 뜻의 ‘단로(檀老)’도 사용했다. <좌수도해(坐睡渡海)>에서는 ‘단구(丹丘)’를, <습득(拾得)>에서는 ‘단구(丹邱)’를 썼고, <노승염송(老僧念誦)>과 <염불서승(念佛西昇)>에서는 모두 ‘단로’라고 적었다. ‘단구’와 ‘단로’가 적힌 그림은 거의 1800년 이후에 제작됐을 것이다. 정조의 승하 이후 김홍도가 겪었을 심정 변화는 어떠했을까.

먼저 ‘단원’이라는 호가 적힌 <절로도해(折蘆渡海)>와 ‘단구(丹丘)라고 적힌 <좌수도해>를 비교해보자. 두 작품은 모두 달마대사가 갈댓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절로도해>는 도석인물화의 전통적인 소재로 김명국(金明國), 심사정(沈師正)의 작품이 현존한다. <좌수도해>는 파도 위에서 어린 사미승을 잠자는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심사정의 작품이 선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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