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금곡스님, ‘17년 동행’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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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불교를 그리다] 금곡스님, ‘17년 동행’ 회향
  • 김남수
  • 승인 2022.05.2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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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그림으로 복원한 낙산사
2005년 4월, 양양을 휩쓴 화마 후 낙산사를 전통에 따라 복원한 금곡 스님. 낙산사와의 17년 동행을 마치고 무문관으로 떠난다.

 

화마가 맺어준 동행

2005년 4월, 낙산사가 위치한 강원도 양양 일대에 큰 화재가 발생한다. 화마가 낙산사를 향하고 있을 즈음, 금곡 스님은 일을 마치고 서둘러 절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 불길이 잡혔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터. 소방당국에는 낙산사 주변에 방화수를 뿌려달라 부탁했고, 사찰의 대중들을 전부 소집해 원통보전의 관음보살님과 탱화를 밖으로 급히 빼냈다. 꺼진 불이 다시 솟아오르고 그렇게 낙산사는 거의 전소됐다.

화마는 기적같이 홍련암 바로 앞에서 멈췄다. 스님이 낙산사 주지로 부임한 날이 3월 20일이니 꼭 보름 만에 벌어진 일이다. 그날 관음보살님을 홍련암으로 옮기며 “관세음보살님, 저 화마가 잡혀 살아남는다면 낙산사를 전통대로 복원하겠습니다”라며 서원했다. 이렇게 낙산사와의 ‘17년간의 동행’이 시작됐다. 

화마에서 살아남은 것은 홍련암과 종무소로 사용되던 전각 한 채, 7층 탑, 원통보전을 둘러싼 담장이었다. 낙산사 동종마저 화마에 녹아버렸다. 다른 날이 밝아지고, 부처님 전에 세운 서원을 실천해야 했다. 홍련암 지척에 비닐하우스로 가법당을 세우고 불자들이 달려와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스님도 기도에 동참했다. 다리를 다쳐 깁스할 때도, 계단이 많은 홍련암 길을 엉금엉금 기어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폐허가 된 낙산사에 기도하겠다고 오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교통편을 제공했다. 그분들은 그렇게 아낀 돈을 낙산사 복원불사를 위해 시주했다. 다녀간 기도객이 20만 명. 그렇게 낙산사 복원의 발을 띄우게 됐다.

“불난 그날 밤, 방송에서 낙산사 복원을 전액 국비로 진행한다는 앵커의 말이 있어 꽤 힘들었어요. 사람들은 복원을 나랏돈으로 하는 줄 알았거든요. 국비는 반만 지원됐고, 나머지는 오로지 낙산사와 기도하러 오신 국민들 원력으로 진행됐어요.”

‘원통보전’ 뒤 뜰. 낙산사의 또 다른 1,000년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화마를 막아야 했다. 뒤에 있던 소나무 300그루를 ‘템플스테이관’ 앞으로 옮기고, 방화림으로 벚나무를 심었다. 멀리 설악산과 백두대간이 보이는 또 다른 명소가 됐다. 

 

김홍도의 그림

낙산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화재를 많이 입었다. 근래에 가까운 것은 6.25 전쟁이었다. 스님은 낙산사를 전통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고 싶어 했다. 옛 모습으로 복원한다는 것은 ‘발굴’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굴’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깊이를 어디까지 팔 것이며, 폭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

“발굴을 신라시대 지층까지 했어요. 조선시대 건물터는 물론 확인했고요. 낙산사는 여러 번 화재를 입었고 그때마다 건물을 복원했죠. 옛 모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죠. 단원 김홍도가 그린 낙산사 그림을 애초부터 염두에 두었지만 어디까지나 발굴 결과가 우선이죠. 그런데, 조선시대 건물터가 김홍도의 그림과 일치했습니다. 옛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유일하게 화마를 피해 간 건물 한 채를 철거해야 했어요. 종무소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어찌 됐든 철거했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화마가 휩쓴 날 부처님과의 약속, 그리고 국민들의 관심과 동참을 생각할 때, 전통의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은 물릴 수 없는 일이었다.

가장 공들인 공간은 낙산사의 상징과 같았던 원통보전이었다. 관음보살님은 기적적으로 살려냈지만, 전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원통보전만큼은 양양의 소나무로 신축했다.

“보와 기둥으로 사용할만한 소나무가 양양에 있어요?”

“있죠. 원통보전 천장과 벽에 있는 단청을 한 번 보세요. 100년, 200년이 지나면 훌륭한 문화재로 기록될 겁니다.”

나무를 찾아, 베고 말리는 기간도 그만큼 길었다. 낙산사의 숨겨진 보물이 원통보전 담장이다. 돌멩이 하나, 기와 한 장, 흙으로 만든 담장은 그 자체로 문화재이고 예술 작품이 됐다. 

양양의 돌을 새로 짓는 전각의 주춧돌로 박았고, 화마에 그을린 나무를 기둥으로 세웠다. 2007년 말, 원통보전이 복원되면서 낙산사의 위용이 되살아났다. 이어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 영역이 복원되고, 일반인들에게 회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은사인 무산 스님의 뜻을 이어, ‘무산복지재단’은 낙산요양원, 낙산유치원, 의상도서관, 무산지역아동센터 등 이웃과 지역을 잇는 나눔을 실현하고 있다. 

양양과 더불어 무산복지재단

낙산사 주변에 특이한 ‘불교인의 마을’이 있다. 낙산사와 함께 2005년 화마를 이겨냈고, 낙산사의 도움을 받기도 했던 용호리에 세워진 마을이다. 2013년 ‘한국가스공사’가 낙산사 인근 용호리 마을에 천연가스 시설을 건립하려고 했다. 화마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주민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금곡 스님의 중재와 가스공사의 사업 변경으로 마을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을 낙산사와 함께하면서 용호리 주민들은 2017년 ‘용호리 불자 마을’을 창립했다. 마을 주민들은 법회도 함께하고, 부처님오신날에는 연등행렬도 진행했다. 잇달아 ‘사천리 불자 마을’, ‘손양면 불자 마을’이 설립돼 7개에 이른다. 이렇게 낙산사는 마을로 다가갔다.

금곡 스님은 복원 불사 중에 또 다른 꿈을 꾸었다. 화마와 함께 고생했던 양양 지역 주민을 위한 사업이었다. 2007년 노인전문요양원이 개원됐고, 양양 중심가에 부지를 매입해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기관과 복지시설을 준비해 나갔다. 

조금씩 부지를 넓혀 낙산유치원, 무산지역아동센터, 의상도서관 운영을 추가했다. 규모가 2,000평에 이르고 여기에 70억 넘는 돈이 들어갔다. 키 포인트는 불사를 마치고 진행한 것이 아니라 불사 중에 진행된 점이다. 

템플스테이관은 한참 공사 중이다. 옛 유스호스텔을 허물어 외관은 전통의 멋을 내고, 내부는 현대식으로 짓고 있다.
홍예문 주변도 정리했다.

 

1,000년 가람을 꿈꾼 낙산사

스님은 천년 가람을 꿈꿨다. 낙산사 불사에 동참한 인원만 20만 명이 넘고, 해마다 낙산사를 찾는 인원도 그 이상이다. 낙산사에 숲을 만들고 숲길을 만들었다. 화마가 지나간 길은 10년이 지나 다시 숲이 됐고 길이 됐다.

불씨를 옮길 수 있는 소나무는 옮겨 심었고, 화마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은 활엽수를 심어 방화목으로 역할을 하게 했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 앞으로 가는 길은 ‘꿈이 있는 길’이 됐고, 원통보전 뒤 소나무 수백 그루를 현재 신축 중인 템플스테이관 앞으로 옮겨 심어 ‘설렘의 길’을 조성하고 있다. 홍련암으로 가는 길은 주변 바위와 어우러진 축대를 쌓았다. 

소나무를 옮기고 벚나무를 심은 원통보전 뒷동산은 또 다른 경관이 될 듯하다. 설악산 대청봉이 저 멀리 보인다. 홍련암에서 일출을 본다면, 이곳에서는 백두대간으로 넘어가는 일몰을 볼 수 있다. 

“사찰은 자연이 주는 혜택을 찾는 분들에게 드려야 합니다. 그분들은 향기를 느끼고, 길을 건너면 번뇌는 소멸하고 희망을 품게 될 겁니다.”  

낙산사를 복원하고 ‘숲’과 ‘길’을 조성했다. “길을 걸으면 번뇌는 소멸하고 희망을 품게 될 겁니다.”

금곡 스님은 5월 말, 17년을 함께한 낙산사를 떠난다. 그동안 낙산사 주지 소임을 스님만이 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두 분도 하셨지만, 복원불사는 어느 하나도 스님의 손길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한다. 

“원통보전 앞 오죽(烏竹)이 올봄에 꽃을 피웠어요. 어느 스님이 오죽은 꽃이 피면 죽는 거라고 하네요. 이제 때가 됐음을 알리는 듯합니다. 저의 작은 힘이 낙산사 복원에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평생의 긍지로 생각할 겁니다.”

원통보전의 주요 부재는 양양의 소나무를 사용했다. ‘원통보전’이라는 현판은 글씨를 갖고 계신 스님이 있어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올 9월이면 옛 유스호스텔을 허문 자리에 ‘템플스테이관’이 들어선다. 신축 건물과 웅장한 소나무가 들어서고 있는 ‘설렘의 길’을 보고 떠날 예정이었지만, ‘시절 인연’으로 조금 일찍 떠나게 됐다고. 

“스님 어디로 가세요?”

“일단은 지리산 무문관으로 가려고 합니다.”

“언제 뵐 수 있나요?”

“무문관을 나와야지요.”

‘김홍도’를 주제로 잠시 시간을 내주십사 했는데, 낙산사 곳곳의 설명을 듣게 됐다. 해수관음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놓인 휴지 한 장을 고개 숙여 줍고 나서, ‘낙산사 17년’ 마지막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허허’한다. 

해수관음 가는 길. 꿈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이다. 

 

사진. 유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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