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탐방] 광주 향림사 조실 천운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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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식 탐방] 광주 향림사 조실 천운 스님
  • 사기순
  • 승인 2007.09.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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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9467년 내장사에 입산하였다. 1947년 지암 화상을 은사로 득도, 1958년 지암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전북 고창 도솔암에서 상수 화 상에게 사교과, 지암 화상에게 재교과를 수료하였다. 승주 송광사 자장선원에서 수선안거, 화순 용암사 선원에서 수선안거 5하 성만, 영암 도갑사에서 수선안거 등 제방에서 수행정진 하였다. 구례 화엄사와 천은사 주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광주지구 갱생보호위원, 5.18광주 항쟁 이념계승사업회 고문, 사랑의 실천 국민운동본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현재 조계종 종립학교 광주 정광중고등학교 이사장, 22교구본사 대둔사 주지, 광주 향림사 조실, 광주 우산종합사회복지관장, 광주소년원 분류심사 종교지도위원으로 있다. 향림어린이 집, 향임유치원, 향림사 신용협동조합, 천운어린이집, 광주불교대학. 대학원을 설립하였으며, 끝없는 포교원력과 인간불사로 조계종 충무원장상을 비롯하여 법무부장관표창.내무부장관감 사장.광주직할시장표창.육군 전투병과학교장 감사패 등 다수를 수상하였다. 저서로 <봐서 행 하는 길><알고 가는 길><끝없는 행원><나의 辯><더불어 사는 삶><참회하는 마음으로 ><참다운 불교인이 되려면...>이 있으며, 역서로 <예수재의식><수륙재의식>등 다수가 있 다.

그날따라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새하얀눈이 수북이 쌓인 길, 뽀드득 뽀드득 눈 위에 새겨지 는 발자국, 아무리 계속 눈이 내려 발자국을 덮어도 족적은 남는 법이다. 그 족적이 크고 깊 을수록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고, 그 향기를 감추려 해도 향기는 은은히 세상을 맑히기 마 련이다. 천운 큰스님, 일찍이 스님의 덕화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일까, 눈 속 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을까 짐짓 걱정스러웠다.

광주 광역시 서구 상무 2동 252-3번지, 새로 지은 듯한 5층 건물이 먼저 반긴다. 광주불교 대학.대학원, 향림출판사. 향림유치원. 향림사 힌용협동조합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건물이 활 기차다. 그런데 향림사 경내에 들어서면서부터 알 수 없는 진짜 팔팔한 살아 있는 생기가 느껴진다.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 웃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집안에 애가 있어야 사람 사는 집 같다는데 절집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스님, 향림사 대중이 얼핏 보기에 50명은 족히 넘을 듯한데, 이 많은 대중들이 어떻게 화합 을 이루며 사는지 궁금합니다.

"부처님 품안에서 사니 자연스레 화합이 이루어지지요. 평소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게 있다 면 될 수 있으면 단점은 보지 말고 장점만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장단점이 있게 마 련인데 단점만 자꾸 캐려들면 함께 못 삽니다. 이는 절집안뿐만 아니라 일반 가정도 마찬가 지예요. 부부지간, 부모자식간에도 좋은 점을 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미운점만 들추 다 보면 점점 미워져서 끝내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장점을 본다는 말씀이 모든 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모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말 씀으로 들립니다.

> "부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 성인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과 똑같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중 생이 다 불성을 갖고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고금의 어느 성인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당신처럼 부처 될 수 있다고 간곡하게 설해주셨는데, 우리 중생들은 수억겁 전부터 익혀온 습관을 떨치지 못하고 중생놀음만 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기 자식 한둘 키우는 것도 힘들어하는데 30명이 넘는 남의 자식을 어떻게 키우시나 의아 했는데, 아이들을 부처님으로 보시고, 원력으로 키우시니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스님, 6.25사면 이후로 줄곧 아이들과 인연이 있으셨지요?

"전쟁 당시 군 복무 중에 전령생활을 했습니다. 전령으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고아원을 찾았지요. 한창 전쟁통이었는지라 고아가 말도 없이 많았습니다. 부모잃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눈에 아른거려 자주 찾아보곤 했지요. 제대하고 나서 절에 찾아오는 고아들을 하나 둘 맡아 기르다 보니 점차 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한 칠십명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 성싶습니다.

"전국의 우리 사형 사제들이 살이야 옷이야 보내주셔서 모자람 없이 기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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