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미천골 선림원지와 영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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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미천골 선림원지와 영혈사
  • 노승대
  • 승인 2022.04.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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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봄이 왔다. 미천골에도 봄날이 왔다. 미천골은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골짜기다. 응복산(1360m)에서 시작된 좁은 계곡은 층암절벽이 양쪽으로 우뚝 솟아 들어갈수록 절경이다. 작은 길은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맑은 계류를 끼고 한없이 들어간다. 계곡의 끝에는 불바라기 약수가 있다. 폭포의 중턱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신기한 약수로 위장병에 특효라 한다. 미천골 초입부터 불바라기약수까지는 40리 계곡이다. 이 비경의 계곡에 봄이 왔으니 마음과 발걸음이 저절로 미천골로 향한다.

지금은 미천골 자연휴양림이 들어서고 옛날 화전민이 살던 터에는 펜션들이 들어섰지만 35년 전에는 미천골 40리 계곡에 집이라고는 딱 한 채뿐이었다. 이미 돌아가신 박용□씨 부부가 기와집 한 채를 번듯하게 지어놓고 토종벌을 키우고 계셨다. 오고 가는 사람도 없고 그 긴 계곡을 혼자 독차지했으니 토종꿀도 무척 품질이 좋았다.

미천골 초입에서 2km가량 들어가면 신라시대 절터인 선림원(禪林院)터가 있다. 804년 순응법사가 세운 사찰이다. 그 이름으로 보아 선종사찰이었을 것이다. 수행승이 많아 쌀 씻은 물이 계곡을 뿌옇게 흐리며 흘러갔다 했고 미천(米川)골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뜸물 흘러간 골짜기’란 뜻이다.

순응법사가 누구인가? 802년에 합천 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두 군데 창건을 동시 진행했다는데, 아마도 순흥법사의 제자가 창건하고 스승을 창건주로 내세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도 절집에는 또한 그러한 풍습이 있으니 자기를 낮추고 스승을 높이는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러나 선림원은 홍각선사탑을 세운 886년 이후 어느 해에 홍수와 산사태로 묻혀버렸고 되살아나지 못했다. 신라시대 유물만 나오고 고려, 조선시대의 유물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인 1948년 선림원터에서 발견된 신라 범종을 월정사에서 보관하다가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서 녹아버린 사연은 이미 춘천박물관 탐방 글에서 사진과 함께 전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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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터는 여러 번의 발굴조사로 거의 조사를 마쳤다. 탑 뒤의 금당(법당)터. 불상을 놓았던 중앙기단과 주춧돌이 드러나 있으나 불상의 흔적은 없다.

 

선림원지에 있는 석물 네 점은 전부 국가지정 보물이다. 금당 앞의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말기 석탑이다. 석가탑양식에 8부신장 조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석탑 앞의 배례석(拜禮石)은 정례석(頂禮石)이라고도 불러왔다. 석탑에 예배할 때 쓰는 돌이라고 했지만 조사 결과 향로석이었다. 곧 향로의 받침돌이었다.

 

886년에 세운 홍각선사의 승탑은 지금 자리에서 50m 위 산기슭에 있었다. 중대석에 운룡문이 나타난 최초의 양식으로 알려졌다. 상륜부는 없어졌다.

 

선림원터 석등은 8각의 기둥돌이 마치 장구 모양으로 변했고 지붕돌 추녀와 하대석에 튀어나온 귀꽃이 있어 신라 말기 양식임을 말해준다. 비례감이 좋다.

 

홍각선사 승탑비는 원래 귀부와 이수만 있고 빗돌이 없었다. 비의 파편만 전해지던 것을 새로 만든 빗돌에 남아있는 글자만 새겨서 다시 세웠다.

 

계곡은 언제나 맑고 푸른 물이 쉴새 없이 흘러간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그래 지금이 호시절이다.

 

靑山(청산)도 절로절로 綠水(녹수)도 절로절로
(푸른 산도 저절로, 맑은 물도 저절로)
山(산) 절로절로 水(수) 절로절로 山水間(산수간)에 나도 절로
(산도 저절로, 물도 저절로, 자연 속에서 나도 저절로)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저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저절로)

_송시열 <청산도 절로절로>

 

소나무에 걸린 달은 천년을 흘렀어라 맑은 이 놀던 뜻은 이제사 알겠으니 흰 돌 위에 나는 여울 그 모습이 아름답다.

 

따스한 봄바람에 두릅싹이 기지개를 켠다. 양양군 서면은 백두대간 동쪽으로 겨울에도 따뜻해 호두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다. 그래도 골은 추워 봄이 늦네.

 

양양에 왔으니 필자가 잘 가던 동호해변으로 간다. 동해의 파도는 언제나 세속의 때를 씻어낸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의 에메랄드 물빛, 황홀하다.

 

양양에도 유명한 막국숫집이 여럿 있다. ‘송월막국수’도 오랫동안 다닌 집이다. 내부 식당 천장의 둥근 통, 무엇일까? 갓을 넣어 보관하던 갓집이다.

 

한국전쟁 때 영동지역의 고찰은 다섯 사찰만 살아남았는데 그중 한 곳이 양양 영혈사(靈穴寺)다. 지금도 솟아나는 신비한 샘이 있어 절이름이 됐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전이 중심법당이었으나 극락보전을 새로 지으며 마당 한쪽으로 옮겨 놓았다. 낙산사 극락보전 관세음보살상이 원래 이곳에 있었다.

 

강원도의 산간사찰의 특징은 법당의 외벽을 나무 널벽으로 마감하는 것이다. 진흙은 구하기 어렵고 나무가 흔하니 나무를 넓게 켜서 벽면에 끼워 맞춘다.

 

낙산사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좌상. 북한군이 원통보전을 탄약창고로 쓰며 버린 불상을 한 신도가 감추었다가 1953년 낙산사를 중건하며 옮겨가게 됐다.

 

원통전 안에 모셔진 후불탱화는 1821년에 조성된 작품으로 낙산사로 옮겨간 관세음보살좌상 뒤에 설치됐었다. 곧 한 짝이었으나 탱화만 남아있다.

 

새로 지은 극락보전. 이 자리가 원래 원통전이 있던 자리다. 영혈사는 신라시대 창건이라고는 하나 중간 기록이 없다가 조선 후기 기록이 많은 게 아쉽다.

 

칠성각도 극락보전 오른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뒷배경이 되는 낙락장송 소나무들이 칠성각의 위상을 한층 높여준다. 법당보다 더 높은 터도 한몫한다.

 

영혈사를 들른 후 진전사지에도 잠깐 들렀다. 저수지를 낀 숲길로 트레킹을 가려고 했으나 산불방지로 출입금지. 절터에서 나온 기와로 쌓은 탑만 돌아봤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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