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쿡의 선과 정토] 보시 바라밀
상태바
[미쿡의 선과 정토] 보시 바라밀
  • 현안 스님
  • 승인 2022.04.06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쿡의 선과 정토 이야기(38)]
Giving paramita
출처 셔터스톡

오늘은 육바라밀 중 첫 번째, 보시 바라밀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제목을 보고 식상한 주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보시에 대한 글을 쓰고자 결심한 이유는 미국 위산사 영화 스님의 해설이 현대 서양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더 많이 와 닿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과 공부는 여러분의 지식 축적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 여러분에게 직접적으로 이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처음 명상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보시행을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넓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과 서양적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시 바라밀(Giving Paramita)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불교에서는 법시(法施) 또는 법보시를 최고로 여깁니다. 법시는 쉽게 말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는 것입니다. 무외시(無畏施, fearlessness)란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 때 편안하게 해줘서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법시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게 없다면, 수행할 수 있나요? 그래서 재물을 나눠주는 재시(財施)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시행을 위해선 세 가지를 모두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다리가 셋인 향로와 같아서, 셋 중에 하나라도 부실하면 바로 서 있지 못하는 원리와 같습니다.

출처 셔터스톡

어떤 사람은 “법시라고? 그럼 불교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하고, 법을 주고, 읽고 또 읽고, 그게 최고라는데?”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자기 생각과 의견을 삽입해서 불교에 대해서 가르치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전하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어떤 법을 줘야 할까요? 스승의 법을 줘야 합니다. 나만의 개인적인 법을 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혜가 부족한데 어떻게 우리만의 개인적인 법을 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모든 번뇌와 망상의 끝을 내지 못했다면, 전해주는 것이 법인지 또는 혼란인지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아직 법(法), 즉 다르마(Dharma)가 없기 때문에, 스승님의 법을 줘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법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자면 법, 즉 다르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걸 돕기 위해 디자인됐습니다. 지혜란 어느 법이 어떤 상황과 어떤 사람에게 적용되는지 아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그런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 법은 매우 중요합니다. 법에 대해서 더 배우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문제를 고칠 수 있는지 배웁니다. 우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니다. 그냥 말만 해서는 안 됩니다. 법을 배우지 않고, ‘난 부처님의 법에 대해서 많이 알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다르마를 사용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자 법을 배웁니다. 만일 우리가 그걸 할 수 있다면 그게 최상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법시란 그냥 입을 열어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해”, “탐진치를 잘라야지”, “공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지”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문제가 있을 때, “이것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방법)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제일의 보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보시도 해야 합니다. 재보시란 재물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가치’를 후원하는 것입니다. 예로 내가 노동으로 보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바닥이 너무 더럽다면, 바닥을 닦는 겁니다. 바닥이 더러울 때 돈을 줘도 당장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재시란 기여할 기회를 찾는 겁니다. 수행하려면 복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니 “내가 도움이 되려면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기여하려면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가짐이 바로 ‘재시’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복이 있다면, 큰 공덕을 지을 기회를 찾을 겁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걸로 드러납니다. 즉, 단지 돈을 주는 게 아니라 돕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재시입니다.

무외시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영화 스님은 보통 사람들에게 참선을 가르칠 때, 결가부좌 자세로 앉는 연습부터 하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도량에 와서 같이 앉아서 참선하고, 건강이 좋아지고, 머리도 맑아지고, 집중력도 좋아집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멈춥니다. 왜 그럴까요? 너무 괴로워서 그렇습니다. 수행엔 많은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큰 괴로움을 보는 순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외시 수행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이 무외시를 수행해야 다리가 아픈 것, 마음이 불편한 것,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무외시를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 자체도 무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똑똑한 자들은 “나는 대신 돈을 많이 벌어서 삼보에 보시할 거야”, “경전을 많이 인쇄해서 법보시를 할 거야”라고 말합니다.

출처 셔터스톡

가난한 자는 오직 법시만 보입니다. 부유한 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똑같은 수준으로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분이 법시만 보면, 아직 복이 부족한 것입니다. 이런 게 “아메리칸 보시바라밀”입니다.

간절히 수행하고 싶다면, 무외시는 어떻게 수행할까요? 수행을 진심으로 하려는 사람을 만나서, 그들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후원을 해줘서, 그들이 수행하는 게 두렵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게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더 중요합니다. 보통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부딪히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진짜로 수행하면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결가부좌로 앉으면, 다리가 아픕니다. 다리가 아프다가 발목도 아프고, 무릎도 아픕니다. 그리고 골반의 통증도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상체도 아픕니다. 온몸이 돌아가면서 다 아픕니다. 절대 멈추질 않습니다. 무섭고, 짜증이 나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수련해도 아픔은 멈추지 않습니다. 아픔의 고비를 넘길 수 있고 일시적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모두 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건 비교적 작은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다 걸고 수행에 몸을 던집니다. 그런데 돈도 없고, 스승도 없고, 법도 없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어둠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누구든 간절히 수행하려면, 갖가지 장애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수행을 막으려고 합니다. 많은 문제가 일어나서 위협하고 관두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다치는 걸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하거나 비난당하는 것을 무서워하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낼 수 있습니다.

수행에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만두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스승도, 악마도, 스승님의 다른 제자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 멈추겠다고 결정합니다. 그래서 무외시가 보시바라밀에서 결정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명상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단 일해서 공덕을 쌓으세요. 복이 충분하면 그때서야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갖 종류의 문제에 부딪히면 산만해지고, 그래서 믿음을 잃습니다. 그와 달리 정법을 수행하면 아주 많은 공덕을 짓습니다.

많은 이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서 절을 짓고, 불상을 세웁니다. 그래도 정법을 만날 복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건 오직 재시만 수행해서 그렇습니다. 일단 다른 이들의 수행을 후원해보십시오. 수행하는 자가 허물이 많든 적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분별하지 말고 누구든 진심으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들을 후원하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수행할 수 있는 차례가 됐을 때, 문제없이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과 불편함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어려워야만 합니다. 그러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행을 견디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 게 수행입니다.

*참고법문: 영화 선사의 ‘보시바라밀’(2014년 12월 26일)

 

현안(賢安, XianAn) 스님
출가 전 2012년부터 영화(永化, YongHua) 스님을 스승으로 선과 대승법을 수행했으며, 매년 선칠에 참여했다. 2015년부터 명상 모임을 이끌며 명상을 지도했으며, 2019년 미국 위산사에서 출가했다. 스승의 지침에 따라서 2020년부터 한국 내 위앙종 도량 불사를 도우며 정진 중이다. 현재 분당 보라선원(寶螺禪院)에서 상주하며, 문화일보, 불광미디어, 미주현대불교 등에서 활발히 집필 중이다. 국내 저서로 『보물산에 갔다 빈손으로 오다』(어의운하, 2021)가 있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