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이순신과 함께한 의승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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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스님] 이순신과 함께한 의승수군
  • 송은일
  • 승인 2022.03.29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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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적을 무찌르다
실상사 자운 스님 부도. 사진 정승채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수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라좌·우수군, 경상좌·우수군 그리고 충청수군의 협력 덕분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던 수군은 전라좌수군이었다. 전라좌수군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직전 임전 태세에 만전을 기했고, 해상의병 등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역과 무관하게 해전에 참전했던 비정규적 수군은 토병(土兵)·포작(鮑作)·노예를 비롯한 승려·전직관료·무과출신·유생 등 다양한 신분 계층의 백성들이었다. 이들은 이른바 해상의병으로 자발적으로 혹은 수군지휘부의 권장으로 직접 해상전투에 참전하거나 해안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해상의병은 육상에서 일어난 의병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 다만 여수 전라좌수영 일원에서 기거하면서 바다에 익숙한 다양한 계층이 봉기해 전라도수군 등과 결합한 형태였다. 

해상의병은 임란 초부터 전라좌수영에 자원 종군해 이순신과 같이한 집단이 있었는가 하면,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해 이순신의 지휘를 받거나 혹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했던 집단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해상의병 중에서도 특별히 주목할 만한 집단은 승려층으로 구성된 의승수군이다(여기서 의승수군은 전라좌수영 관하 소속이었던 승려층 수군을 말한다).

 

전라좌수영에 배치된 의승수군

의승수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곧 편성됐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은 경상도 해역에서 일본군과 초기 해전을 치르면서 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목적으로 1592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남해안 일원 고을에 통문을 보내 승려들과 병적에 들지 않는 백성들을 모두 모집했다. 그리고 이들을 광양과 구례 그리고 순천 일원의 도탄과 두치 등지를 방어하도록 했다. 이때 한 달 사이에 전라좌수영 산하에 모여든 승려들이 400여 명이나 됐는데, 이들은 의승수군으로 편성됐다. 이 시기 승려들이 전라좌수영 산하에 모여든 것은 이순신의 호소 통문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자발적이었다. 

이 의승수군은 여러 사정으로 1592년 겨울 일시적으로 해산했다가 이듬해 봄에 재결성했다. 당시 호남지방의 의승군을 대표했거니와 조직과 운영 면에 있어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을 중심으로 한 전국 규모의 의승군 조직에 예속되지 않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하면서 전라좌수영 전라좌수사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이순신은 이 의승수군 중 용맹과 지략을 겸한 승려를 선발해 승장으로 임명했다. 예컨대 시호별도장(豺虎別都將) 삼혜(三慧), 유격별도장(遊擊別都將) 의능(義能), 우돌격장(右突擊將) 성휘(性輝), 좌돌격장(左突擊將) 신해(信海), 양병용격장(揚兵勇擊將) 지원(智元) 스님 등이 그들이다. 여기서 삼혜와 의능이 맡았던 별도장은 의승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승군 대장으로 나중에 조선 조정에서 팔도도총섭겸승대장(八道都摠攝兼僧大將)이라는 직을 부여했다. 유격장은 별도장 막하의 지대승장으로 나중에 조선 조정에서 도승통겸승대장(都僧統兼僧大將)이라는 직을 하사했다. 이 별도장들은 전라좌수영 의승수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바로 아래 지대승장을 두고 그 아래에 다수의 의승수군을 통솔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시 의승수군의 지휘체계를 보면 ‘전라좌수사 → 별도장 → 지대승장(좌돌격장, 우돌격장 등) → 의승수군’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의승수군의 통솔은 별도장(승장)이 했으나 별도장의 지휘는 전라좌수사가 직접 하달하는 체계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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