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든 스님] 전쟁과 살생, 스님들의 고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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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든 스님] 전쟁과 살생, 스님들의 고뇌
  • 정운 스님
  • 승인 2022.03.2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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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성에 계실 때다. 사위국의 유리왕은 어린 시절, 외가였던 카필라국에서 천대받았던 경험이 상처로 남아 있었다. 언제고 보복할 마음을 먹고 있다가 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카필라국을 패망시키는 일이었다. 어느 날 유리왕은 전쟁 준비를 마치고, 카필라국을 향해 갔다. 카필라국에 다다를 무렵, 길녘에 부처님께서 뙤약볕 마른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유리왕은 부처님을 보고 말에서 내려 말했다.

“부처님 저쪽 큰 나무 아래 녹음이 우거진 곳에 계시지 않고, 그늘도 제대로 되지 않는 작은 나무 밑에 계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의 고향 카필라국은 이렇게 초라한 작은 나무나 다름이 없소. 저 큰 나무 그늘보다 나의 고향 같은 이 작은 나무 그늘이 더 편안하다오.”

유리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본국으로 되돌아갔다. 유리왕은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했고, 네 번째는 부처님도 길을 막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나의 고향 카필라국의 인연도 다하였구나”라고 하셨다.

이 내용을 ‘깨달은 성자도 고향에 대한 애착이 있다’라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필자는 달리 본다. 부처님 입장에서 전쟁으로 수많은 중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안타까웠을 거라고 본다. 어느 누군들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겠는가! 가해자 국가 사람이든 피해자 국가의 사람이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똑같은 자식 같은 중생들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고, 200년 동안 전란이 없던 평화로운 강산에 중생들의 피가 낭자할 때, 우리나라 조선시대 승려들은 어떠했을까? 부처님이 어느 나라 중생이든 똑같이 자식처럼 여겼듯이, 스님들도 가해자인 일본인이 안타까웠을까? 혹 죽어가는 동족을 보면서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전쟁에 대한 네 가지 생각

스님들 중에는 서산대사의 제자 사명대사처럼 의승군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지만, 아무리 적군이지만 승려가 칼을 들고 사람을 살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70여 명인데, 당시 사회상황에 대처했던 방식에 따라 스님을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승군을 이끄는 의승장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서산휴정·기허영규·뇌묵처영·사명유정이다. 둘째는 의승군도 아니고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분들인데, 편양언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의승군으로 잠깐 활동했다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은둔한 경우인데, 경헌(敬軒)·청매인오·기암법견 등이다. 넷째는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승려의 본분을 지켰던 소요태능·정관일선과 휴정과 동문인 부휴선수 등이다.

당시 조선 사회의 승려들은 신분이 보장된 위치도 아니었다.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 중에는 살생 업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살육 현장에 나갔던 이들이 적지 않다. 이와 달리 철저하게 출가수행자로서의 길을 걸었던 분들도 많다.

수행자로서 철저하게 본분을 지킨 승려가 옳은가? 아니면 불살생을 어기면서까지 적군에게 칼을 겨눈 승려가 잘한 것인가? 국가가 온전해야 종교인의 삶도 있는 법이다. 조국이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근자에 한국불교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호국불교 승려들을 내세우지만, 필자 입장에서는 반대도 지지도 아니다. 어떤 선택을 했든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요, 어떤 길을 선택했든 승려들의 공통점은 중생에 대한 대비심(大悲心)이 전제돼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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