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다산초당과 백운동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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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다산초당과 백운동정원
  • 노승대
  • 승인 2022.03.2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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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은 볼거리,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명산인 월출산 남쪽에 있는 데다 강진만 넓은 갯벌이 있어 산물이 풍부하다. 자연스럽게 먹거리가 발달해 이름 있는 한정식집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니 굳이 한정식집이 아니더라도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백반상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먹거리가 좋고 날씨가 따뜻하니 겨울에는 전지훈련 온 선수들로 방을 구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강진 하면 김영랑을 잊을 수 없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겄네”를 어느 누가 잊겠는가? 또 강진 하면 떠 오르는 인물, 바로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이곳에서 18년 귀양살이를 하며 『목민심서』 등 많은 책을 저술했다. 어디 그뿐인가? 다산초당에 머물며 백련사의 혜장 스님과 우의를 나누고 초의선사를 소개받아 시학(詩學)과 유학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강진에는 조선 초기의 절 무위사가 있고 만덕산 백련사가 상록수림에 싸여 있다.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를 생산하던 도요지와 한때 크게 번성했던 월남사지도 있다. 차를 만들던 전통이 이어져 월출산 남쪽 자락에 큰 차밭도 있고 담양 소쇄원처럼 오랫동안 가꿔온 백운동 별서정원도 있다. 그러니 몇 번씩 와도 갈 곳이 있고 볼 곳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 답사여행객의 영원한 로망, 바로 강진이다.

 

만덕산 동백나무 숲은 수 천 그루가 자생하고 있고 참식나무 등 상록수와 어울려 언제나 푸르름을 지킨다.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백련사를 오가던 길이다.

 

그 푸르름 속에 백련사가 있다. 고려 때 보조국사의 수선결사와 함께 원묘국사가 백련결사를 도모한 고찰로 수선결사는 참선을, 백련결사는 염불을 주창했다.

 

대웅보전, 만경루, 명부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가 썼다. 그는 신지도로 유배와 16년을 살다 죽었다. 소실된 백련사를 중건한 1762년 무렵 쓴 글씨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 나무뿌리가 다 드러났다. 호우가 내리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이 다산을 흠모하여 찾아오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표적 지성 아닌가.

 

초당 오르는 길목엔 다산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묘가 있다. 19세기에는 지방의 양반들이 문인석, 무인석을 흉내 내어 석인상을 세우는데 야무지고 귀엽다.

 

다산초당은 원래 초가였으나 복원하며 기와집이 됐다. 초당 아랫마을은 해남윤씨들이 모여 살았고 외가가 해남윤씨인 다산은 이들의 도움으로 옮겨왔다.

 

초당 동쪽의 동암(東庵)은 다산이 2,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공부하며 글을 쓰고 손님을 맞던 곳이다. 관리 지침서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썼다.

 

동암에 걸려 있는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쓴 것이다. ‘정약용을 보배롭게 받드는 산속의 집’이라는 뜻이다. 추사체의 맛이 오묘하다.

 

동암 동쪽 언덕은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며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던 곳이라 한다. 세상 끝 정자라는 뜻의 천일각이 새롭게 서 있다.

 

초당 서쪽 서암(西庵)은 다산이 18명 제자를 기르고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초당 뒷산은 야생차가 많아 다산(茶山)이라 했고 정약용의 호가 됐다.

 

초당 뒤의 약천(藥泉). 일찍부터 차를 접한 다산은 강진에서 차 마니아가 되어 차도 직접 만들었다. 유배가 풀린 후에도 차모임인 다신계를 꾸렸다.

 

초당 앞에 있는 넓적바위. 이를 다조(茶竈, 차 부뚜막)라 하는데 다조는 불을 땔 수 있는 풍로 형태다. 다산의 시에도 나와 있다. 차탁이 오히려 맞겠다.

 

다산이 자신의 성씨만 넣어서 자연석 바위병풍에 새겼다는 정석(丁石). 글씨체가 다산의 성품대로 곧고 단정하다. 바위에 이름을 주어 역사에 남았다.

 

강진 무위사 극락전은 조선 초기 건물로 고려의 양식을 이어받은 맞배주심포 양식이다. 정유재란에도 살아남았고 당연히 국보다. 내부의 벽화가 일품이다.

 

선각대사비. 선각대사는 왕건이 나주에서 견훤의 수군을 완파한 후 그를 따라 태봉국 철원으로 갔으나 왕건을 비호하다 917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존불 뒤에 있는 후불벽화. 고려시대에는 걸개그림인 탱화 대신 불상 뒤에 바로 벽화를 그렸었다. 곧 탱화는 조선시대에 활발하게 유행한 양식이다.

 

백운동 별서정원은 이담로(1627~1701)가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은둔하고자 살림집과 떨어진 곳에 지은 별채에 딸린 정원이다. 백운동 암각글씨.

 

다산은 1812년 이곳에서 하룻밤 묵고 간 후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12경 시문을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정원을 다시 재현했다.

 

귀엽고 소박한 다실. 백운동 원림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 세연정과 함께 호남의 3대원림이다. 백 그루 홍매화는 사라졌으나 동백나무 숲길은 여전히 깊다.

 

다산이 아름답다고 읊은 백운동 12경 시에도 왕대나무 숲이 들어 있다. 높이도 높이거니와 말쑥하게 가꾸었으니 그 싱그러움을 어디에 비길 수 있나.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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