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명량대첩 승전지 울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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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명량대첩 승전지 울돌목
  • 노승대
  • 승인 2022.03.1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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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 8월 3일,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하라는 선조의 교지를 받았다. 그러나 전 달인 7월 15일, 부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바다 길목인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거북선 3척, 전투함인 판옥선 70여 척을 잃고 수군 병력 1만 7,000여 명도 거의 전멸했다. 일본 수군의 서해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8월 18일 이순신은 전남 장흥 천관산 남쪽 회령포에서 칠천량에서 판옥선 12척을 끌고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렴의 배를 인수했다. 3일 전에 ‘수군이 없으니 육지로 올라와 권율의 휘하에서 싸우라’는 선조의 편지를 받고 이순신은 장수로서 통한의 상서를 올렸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죽을힘을 향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이미 8월 15일엔 남원성이 함락되고 8월 19일엔 전주가 무너졌으니 전라도, 충청도를 일본육군이 마음대로 유린하고 있었다. 육지의 포구에는 마음대로 정박할 수 없는 상황, 이순신은 여러 포구를 전전하며 밀려오는 일본 수군에 밀려 남해를 돌아 진도와 해남 사이의 울돌목(명량)에서 최후의 결전을 하기로 작정했다. 폭이 좁고 해류가 거칠어 바다가 운다는 울돌목, 그 바로 옆에 있는 우수영(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에 13척의 판옥선을 끌고 9월 15일 도착했다.

드디어 9월 16일 결사항쟁의 날, 일본 수군은 133척의 배로 북쪽으로 흐르는 해류를 타고 울돌목으로 들어왔고 이순신은 일자형으로 늘어선 13척의 배로 대결했다. 도망만 치려는 장졸들을 부추겨 승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오후 1시, 멈추었던 해류가 다시 남쪽으로 역류하기 시작하자 해류를 타고 나아가며 포를 쏘고 화살을 날리며 돌진, 일본 수군은 서로 부딪치며 자중지란에 빠졌다. 조선 수군 900여 명이 일본 수군 7,200명을 통쾌하게 무찌른 완승이었다.

울돌목에 놓인 진도대교 아래에서 격렬하게 흐르며 솟구치고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바라보며 이순신을 다시 기억해 보는 사람이 어찌 나 하나뿐이랴.

 

진도로 가는 길에 무안 법천사 목우암에 들렸다. 절 뒤 동백숲과 비자나무가 아름다운 절인데 아직 동백은 피지 않았다. 원나라 승려 원명이 지었다 한다.

 

법당 앞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등이 있다. 조선시대에 만든 석탑이나 석등은 귀하다. 디자인도 독특하다. 숙종 7년(1681)에 스님들이 세웠다.

 

마당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이 승달산(僧達山)은 333m밖에 안 되지만 무안군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이름처럼 스님이 수행하면 깨친다는 명산이다

 

법천사 초입의 사찰 장승은 사찰구역임을 표시하는 동시에 절에 들어오는 전염병이나 액난을 막는 구실을 한다. 남장승에는 시골 노인의 웃음이 어렸다.

 

여장승도 푸근한 시골 할머니 표정이다. 머리의 트레머리가 여성임을 말해준다. 두 손도 무심하게 새겼다. 초기의 무서운 장승이 친근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목우암 축성각은 내부가 나한전과 산신각으로 나뉘어 있다. 어느 나한의 기묘한 자세가 재미있다. 가끔씩 귀를 후비기도 하고 턱을 괴고 있기도 하다.

 

이 나한님은 날이 몹시 더웠는지 맨발을 무릎까지 드러내고 계시다. 짜증이 나셨는지 입술이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래도 깨친 분인데 참으시죠.

 

간혹 나한님의 배열순서를 새겨 놓는 경우도 있다. ‘우 제칠(右 第七)’이니 오른쪽으로 7번째 자리에 앉는 나한이란 뜻이다. 16명이니 헷갈리기도 하겠지.

 

목포에서 진도로 가기 위해 고하도로 건너면 여기에도 이순신기념비가 있다. 이순신은 명량에서 승리한 후 이 섬에서 108일간 군진을 설치했다.

 

영산강을 뺏기면 왜군에게 군수물자가 보급되기 때문이었다. 1772년에 세운 비는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야산에 버렸고 광복 이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

 

진도대교 아래로 울돌목의 거친 해류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북쪽으로 내닫는다. 이순신 장군의 포효와 병사들의 함성 소리, 일본 수군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명량해전도에는 홀로 왜군을 막아선 이순신의 배가 보이고 뒤쪽에 나란히 선 판옥선이 그려져 있다. 고군분투다. 섬을 끼고 둥글게 파인 곳이 우수영이다.

 

이순신은 명량해전 당일 우수영에서 나와 울돌목 위쪽에 일자형 군진을 쳐 승리한 후 다시 우수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지금도 지명이 우수영이다.

 

해전은 승리했지만 전라·충청도는 이미 왜군의 분탕질로 백성들이 바다로 탈출했다. 영광 선비 강항이 배로 이순신에게 가려다 9월 23일 포로가 된다.

 

우수영 명량대첩비각 안에는 1688년에 세운 비가 우뚝 서 있다. 1942년 반시국적 고적(古蹟)이라 하여 일제가 서울로 옮겼다. 해방 후 돌아왔으나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가 2011년 원위치로 옮겼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땀을 흘리는 이적이 있었다. 비각의 단청 속에 이순신의 초상이 있다.

 

이순신 영정을 모신 충무사. 명량대첩비가 서울에서 돌아와 학동리에 세워지자 1964년 충무사를 세웠다. 대첩비가 원위치로 옮겨가자 충무사도 이전됐다.

 

전라 우수영에 근무했던 역대 수군절도사와 관료들의 공덕비. 이 비석들도 충무사를 따라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원래는 대첩비각 앞에 나란히 세워졌었다.

 

진도대교를 건너 보물 금골산 오층석탑에 왔다. 백제계 석탑답게 늘씬하고 지붕돌이 얇다. 작년 11월 19일부터 국보와 보물의 지정번호가 사라졌다.

 

금골산(金骨山)은 높이 193m의 작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많아 ‘진도의 금강’이라 했다. 산 정상 절벽 아래 마애불과 절터가 남아 있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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