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보령 성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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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보령 성주사지
  • 노승대
  • 승인 2022.03.0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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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는 선종사찰이었다. 선종(禪宗)은 신라 말기에 들어오지만 서라벌에는 발을 붙이지 못한다. “누구나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너무 혁신적인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부처님과 동격이 된다니 이는 마귀의 소리”라고 배척당했다. 그러나 당나라에서는 선종이 유행하고 있었고 신라승들은 당나라 선사들의 인가를 받고 귀국해 지방의 호족들 지원으로 선종 세력을 크게 확장해 나갔다.

대표적인 선종사찰 아홉 곳을 선문구산(禪門九山)이라고 한다. 성주산 성주사도 그중 하나였고 성주산문으로 불렸다. 선종의 가르침은 서라벌 교종 승려와 귀족들에게는 안 맞았지만 혼란기 지방 호족들에게는 잘 맞았다. “누구나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말은 “나도 힘을 떨치면 왕이나 귀족이 될 수 있다”고 해석됐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 국사(881~888)는 무열왕의 8세손이지만 아버지 대에 진골에서 6두품으로 떨어졌다. 보령의 호족인 김양도 무열왕 9세손이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후손이었지만 중앙정계 진출은 어려운 입장이었다. 보령 일대는 김인문이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신라조정에서 하사받은 땅이었다. 김양은 무염 국사를 초청해 백제시대 오합사를 대대적으로 중창해 성주사로 이름을 바꿨다. 성주사지에 있는 무염 국사 낭혜화상탑비는 최치원이 지은 비문인데 최치원 또한 육두품 출신이니 비문 내용에도 골품제도에 대한 불만이 나타났다.

신라 말기에 경주 최씨 가문에는 비상한 천재 3명이 동시대에 활약했다. 육두품이라 고위관직에 오를 수 없으니 모두 당나라로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다. 보통 ‘일대3최(一代三崔)’라고 불렀으니 최치원, 최인연, 최승우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운명은 달랐다. 최치원은 신라를 섬기다 가야산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최승우는 견훤에게 갔으나 그가 몰락함에 따라 자취조차 남기지 못했다. 최인연은 최치원의 사촌 동생으로 왕건에게 가서 최언위라는 이름으로 많은 비문과 글을 남기고 있다. 글도 잘 써 낭혜화상탑비도 그가 썼다.

 

9,000여 평(약 29,752㎥)의 성주사터. 전성기에는 불전 80칸, 행랑 800칸, 창고 50칸 등에 2,000여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 국보 1점, 보물 4점이 있다.

 

탑 앞의 석등이 번잡스럽지 않고 조신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라양식인데 창문을 걸 수 있는 구멍 흔적이 없어 조선시대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절터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오층석탑. 일 층 몸돌 아래에 받침돌을 두었다. 이 형식은 고려시대에 유행하는데 그 선구가 되는 탑이다. 늘씬하다.

 

금당(金堂)은 곧 주 법당이다. 중앙계단 소맷돌이 아치형으로 변하고 그 앞에 돌사자 두 마리가 귀엽게 앉아 있다. 법당이나 탑을 지키는 상징이었다.

 

원래 있었던 돌사자 사진이다. 1986년 도굴꾼들이 한밤중에 훔쳐 갔다. 하기야 스님들이 살고 있는 불국사 석가탑도 1966년 도굴차 들어 올렸었다.

 

금당터의 뒤쪽 계단석이 전형적인 신라양식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계단 양옆의 소맷돌이 사선으로 내려갔고 측면은 이중으로 파냈다. 신라의 기본양식.

 

금당과 강당 사이에는 특이하게 3기의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확인됐다. 각각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다.

 

가운데 석탑의 문비.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예경하는 법당의 의미가 있다. 저런 자물쇠가 진짜 있는 것인지 한 때 의문이었었다.

 

고려시대에 사용되던 금동 자물쇠가 발견되면서 탑에 새겨진 자물쇠가 실제로 사용되던 물건임을 알게 됐다. 용머리도 있고 연꽃봉우리로 된 것도 있다.

 

왼쪽 석탑 모서리에 뚫려 있는 구멍들은 조각된 금속판을 부착했던 자국일 것이다. 추녀마다 풍경이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몹시 화려한 모습이었겠지.

 

금당터 뒤의 강당터 중앙계단. 양쪽 소맷돌이 사선에서 둥근 선으로 변모했다. 고려시대에는 둥근 아치형으로 변하기 때문에 그 시원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보인 낭혜화상탑비. 이 지역은 바로 보령 오석(烏石)의 산지다. 보령 오석 벼루가 유명했듯이 비석 몸돌은 천 년 세월에도 깨끗하다. 야무진 돌이다.

 

인근의 고찰 백운사에도 들렸다. 새로 닦은 찻길을 비껴 옛길로 가니 기이한 정연당 승탑이 반긴다. 석종형 승탑을 수직으로 다듬고 법명을 새겼다.

 

쭉쭉 뻗은 낙락장송 사이로 옛 오솔길이 선명하다. 이고 지고 가파른 길을 올라와 절이 보이는 이 솔숲에 들어서면 저절로 환희심이 피어났으리라.

 

작지만 해묵은 극락전 안에는 산신탱화도 모셔져 있다. 옛 양식 그대로여서 산신이 넉넉한 모습으로 표범인 개호랑에 기대어 앉았다. 시동도 네 명이다.

 

강희 23년(1694)에 전라도 안화사에서 조성한 목조 제화갈라상이다. 석가모니, 미륵보살상과 함께 삼존이 되지만 인연이 흩어져 이 불상만 남았다.

 

현왕탱화의 염라대왕이 머리에 얹고 있는 것은 『금강경』이다. 『금강경』을 독송하고 염라대왕의 손길을 벗어난 이야기도 많이 있어 그 상징으로 이렇게 그린다.

 

보령에서 안면도로 연결되는 해저터널이 개통됐다. 길이는 6,927m로 보령시 대천해수욕장과 원산도를 연결한다. 국내 최장터널로 11년 만에 완공됐다.

 

안면도 자연휴양림의 소나무숲 데크길. 이곳은 조선시대에도 왕실에서 관리했고 경복궁 중건 때도 안면도 소나무를 썼다. 사흘이면 한양으로 갈 수 있었다.

 

안면암의 수중 탑. 밀물이 들어오면 부교 위를 걸어서 탑으로 갈 수 있다. 물이 빠지면 갯벌 체험을 해야만 한다. 여우섬 사이로 보이는 풍광이 멋지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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