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일엽 스님의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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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걸, 불교에 빠지다] 일엽 스님의 구도
  • 경완 스님
  • 승인 2022.02.2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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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구도자 불법의 구도자 되다
-일엽 스님의 출가 후 삶
출가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일엽 스님의 거처를 찾았다. 스님은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법문을 펼쳤다. 김일엽문화재단 소장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불교에 입문해 출가한 이후 눈 푸른 납자(衲子)로서 투철한 수행과 덕행으로 일관한다. 이에 관한 증명은 여러 말 필요 없이, 스님으로서의 생애 대부분을 견성암 입승을 지낸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다. 당시는 선원장이 없던 시대여서 입승이 실제로 비구니 선방을 이끌던 소임이었다. 필자는 일엽 선사의 문하 4대인 손상좌다. 일엽 노스님의 행장을 살핀 적이 있으나 그 깊이를 헤아리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곁에서 모셨던 환희대 어른 스님과 덕숭산 산중 조실 스님의 조언을 들으며 두 가지(애정관의 승화, 세계적 불교관) 면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선승의 풍모를 풀어 보고자 한다. 

일엽 스님의 출가 후 ‘사랑’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초심 행자인 내게 어느 사형인가가 어느 날 문득 일엽 스님의 회고록인 『청춘을 불사르고』를 건네줬다. 그때 내게 그 책은 너무도 낡고 남루했다. ‘펼치자마자 보이는 <B 씨에게>라니?’ B 씨에게 보내는 스님의 편지였다. 20살, 서슬 퍼런 초발심 자인 나는 언뜻 참뜻을 보기도 전에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덮어 버렸다. 그 후 수십 년 세월이 흘렀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논문 발표를 위해 ‘다시 읽기’를 하게 됐다. 그제야 그 진면목을 조금이나마 알아챌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글의 참모습은 일엽 노스님의 말씀대로 ‘연애로 은유한 설법’임을! 인류의 초관심사인 사랑을 주제로 이목을 끌었고 그 안에 불교를 녹여내고 있음을 말이다. 

일엽 노스님은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내게 있는 것은 다 쏟아 놓고 사는 사람”이며 “사랑에 대해 순정적이며 철저했으나 주체를 잃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자신의 사랑, 순정, 이별을 진솔하게 풀어 놓는데, 그 솔직함으로 인해 종종 독자의 오독을 불러온다. 이렇게 ‘잘못 읽기’한 글은 그저 그런 연애사, 흔한 고백담이 돼버린다. 알고 있는가? 악마만 디테일에 있는 것은 아니다, 참됨도 진실함도 사실은 미세한 법이다. 자고로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일엽 노스님에게 ‘누구에게 구속되거나 철저하게 순정을 바치는 사랑’이 출가 전 사랑이라면, ‘생명력을 가진 완벽한 인격체로서의 동등한 사랑’은 출가 후 각성한 사랑이다. 지나치게 플라토닉한 러브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야만 이별과 충동의 고(苦)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재삼 설득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서로 연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 하나의 생명체로서, 이것을 알게 된다면 서로 간의 믿음은 굳건해 깨질 틈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천명한다. 그리하여 이제 일엽 노스님의 사랑은 더 넓은 사랑, 즉 박애(博愛)와 자비로 확장한다. “서로 완전한 인간이 되면 우주가 다 내 마음이며 일체로서, 부모와 형제, 동지와 원수, 정적(政敵)과 연적(戀敵)과도 유유하게 살게 된다.” 그래서 만약 그 누군가 그 대상이 “사는 길을 잃어버리면 자신의 시간, 노력, 생명 등을 희생하고서도 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보살의 자비는 모든 생명을 향하는 정미(精微)로움이 아니던가? 이는 박애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자비심으로 생명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이다.

일엽 노스님의 자비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일엽 노스님 문하 3대이며 손상좌인 정진 스님과 김일엽문화재단 이사장 월송 스님의 이야기다. 두 어른 스님은 젊은 시절 어느 날, 삽교역으로 오는 기차를 타게 됐다. 옛날 기차에는 승객들을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잡상인이 많았다. 허름한 차림의 농군 같은, 가난해 보이는 남자가 책을 팔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인정에 호소하며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책 제목이 놀랍게도 ‘김일엽지 묘’였다. 깜짝 놀라고 화도 났지만, 차분히 어떤 경로로 책을 팔게 됐는지 물었다. 남자는 자신이 김일엽의 사생아로 이런저런 이유로 책을 팔게 됐다고 했다. 놀란 가슴을 억누르고 책도 한 권 사서 당시 환희대에 계시던 일엽 노스님께 상황을 보고했다. 숨을 헐떡이면서 큰 난리가 난 것처럼 말씀을 올렸다. 

“노스님 큰일 났어요! 노스님을 빙자하고 이 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생아라고 그러면서 책을 팔고 다니니 이 노릇을 어떡하면 좋아요? 책이 이제 덤핑이 돼서 이렇게 노스님 얼굴에 먹칠하고 다닙니다.” 

일엽 노스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저작권이나 명예를 운운하셨을까? 반전이라는 말이 이럴 때 어울릴까? 일엽 노스님은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평상심 그대로 담담하게 아무 표정도 없으시더란다. 

“호들갑 떨 것 하나도 없다. 김일엽이라는 이름 석 자가 뭐라고? 그 이름이 도대체 그 가치가 얼마나 되길래? 만일 나를 빙자해서, 한 사람이 생을 버틴다면, 한 남자가 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장사를 해서 돈이 생기고, 또 그걸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내가 한 사람을 구제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그건 좋은 일이고,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다. 김일엽이라는 이름이 몇 푼어치나 된다고! 내 이름으로 한 사람이 살아갈 수 있고, 나로 인해서 누군가가 생애를 이어갈 수 있으니,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한 사람이 그렇게 생을 이어간다면 참 다행인 거지, 호들갑 떨 것 하나 없다!”

누군가 마음의 넓이를 말한다면 일엽 노스님의 말씀에서 삼천대천세계에 버금가는 호방함과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돌이켜 보니 손주인 나도 세간에 떠도는 갖가지 소문들에 그렇게까지 마음 둘 일은 아니라고 떠듬떠듬 되뇌어 본다. 지금 생각하면 우선은 저작권이 소홀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당시의 상황은 이랬다고 한다. 일엽 노스님은 약 30년 절필 후 1960년 『어느 수도인의 회상』을 처음 출판했다. 이후 첨삭과 윤문을 하고 제목을 바꾼 『청춘을 불사르고』(1962년)가 나왔고, 이 작품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짐작과는 다르게 변변한 저작료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처음 계약한 출판사는 다른 사업으로 도산하게 됐다. 이후 판권이 팔리고 팔려서 청계천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상황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제목만 바꾼 같은 내용의 그 책이 기차에서 팔리고 있었고, 따지고 보면 그 남자도 그 책과는 아무 관련 없는 그저 가난한 장사꾼이었을 뿐이었다. 일엽 노스님의 이와 같은 일화는 박애라고 이름하는 덕행이요, 불보살의 자비다.

 

기독교 친구의 방문

몇 해 전인 2016년에 일엽 노스님의 육성을 보관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기억하건대 일엽 노스님의 육성을 녹음한 릴 오디오 테이프를 오래도록 환희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공적이지 않은 일이 더러 그런 경우가 있는데, 어른 스님께서 모 방송국 PD인 신도를 통한 알음알음으로 그 테이프를 복원하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어서 알아보니 그 테이프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신도이니 고소를 할 수도 없고, 그저 발발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연락을 받고 어쩌면 사라졌던 바로 그 육성 릴 테이프인가 했으나 알아보니 그것은 아니었고, 소장하신 분이 기자 시절에 직접 녹음한 기록이었다. 어쨌거나 반갑고 고마운지 소정의 보시를 지불하고 회수하게 됐다. 2개의 릴 오디오 테이프를 각각 15분가량의 파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녹음에는 메디컬센터에서 치료받은 일, 견성암 불사를 위해 했던 연극 ‘이차돈의 사’ 관한 것 등이 나온다. (1967년 10월 24일 녹음) 여기서 목소리의 진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어른 스님인 월송, 정진 스님은 자신을 언급하는 말씀에 살짝 눈물이 비치기도 했다. 

이 대담은 근황과 함께 여러 가지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고 있는데 두 번째 파일은 중간에 시작하는 느낌이어서 이 테이프도 어딘가 더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생명, 천당과 지옥, 그리고 종교에 관한 내용이 이어진다. 그 내용의 연결고리를 거슬러 찾아보니 일엽 노스님의 세 번째 작품집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로 이어진다. 일엽 노스님은 평소에도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며 누구도 마다하지 않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법문을 펼치셨다. 더러 유명한 다른 이웃 종교 인사가 오면 더군다나 열정적이었다고 한다. 

1965년 같은 기숙사에서 자란 김활란 씨와 서은숙 씨가 일엽 스님을 방문한다. 전 중앙일보 기자인 서은숙 씨는 ‘일엽 스님이 김활란 씨를 “헬렌 선생 아니야?”라며 반겨줬고 주로 일엽 스님이 얘기하며 포교를 했다’고 기억한다. 김활란 씨가 대화를 통해 어떤 감화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방문 이후 다 하지 못한 말씀을 사상으로 펼친 <세계교를 제창한다>라는 글이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에 실려있다. 전체 내용을 현대적 시각으로 보자면 무릇 종교 화합이자 세계적 불교관이라 할 수 있다. 

일엽 노스님은 “문명에 기여한 바 있는 기독교와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가 서로 교류하여 사업을 이룩하자”라고 웅변한다. 비유하자면 “김활란 씨는 다리로, 나는 눈으로” 인류를 다시 살리고 교화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선각자의 고구정녕(苦口丁寜)이요, 예지적 선언이다. 실로 다종교 사회인 지금 바로 여기에 유용한 설법이니, 앞서간 분의 뛰어난 선견지명이라 할 수 있다. 김활란 씨는 다녀간 후 환희대로 다기를 보내왔다고 한다. 위의 글 끝에 “귀한 손님이라 씁쓸하게 달인 작설을 내었는데, 찻종이 없어서 ‘김치보시기’에 내었고, 활란 씨는 좋은 나무로 얌전하게 짠 궤짝에 넣은 아담한 감 푸른 찻종 일습을 보내왔다”라고 적고 있다. 그 잔 몇 개가 여전히 환희대에 남아 있다. 일엽 노스님은 각각 다른 두 종교를 체험했고, 불교 입문 후에는 투철한 수행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스스로 종교 수행의 증명임을 이처럼 천명했다. 깊고 원만하여 원융(圓融)한 사상이 느껴진다. 다만 찬찬히 야무지게 살피기에는 부족한 시간과 안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위와 같이 일엽 노스님이 글과 대화를 통해 불교를 해석하고 전파하는 일은, 사실은 30년 만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입산 직후 ‘불법(佛法)을 우주화(宇宙化)시키겠다’는 <서원문>으로 지은 것이 바로 <나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시문에는 불교를 위해 노래하겠다는 서원이 오롯이 담겨있고 어느 구절도 다 소중하여 전문을 인용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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