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청룡사와 최초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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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청룡사와 최초의 여성 꼭두쇠 바우덕이
  • 노승대
  • 승인 2022.01.13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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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안성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대표적 근거지였다. 사당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억불정책이 시행되면서 이런저런 사연으로 절에 의탁해 살던 여인들이 살길을 찾아 떠돌이 예인집단을 이루며 시작됐지만, 조선 후기에 기예를 익힌 사내들이 남자 위주로 꾸려진 남사당패를 만들었다. 남사당은 남자 꼭두쇠(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보통 40~50명으로 구성됐다. 봄부터 가을까지 전국을 떠돌다가 추워지면 사당패를 받아 줄 곳으로 들어와 기량을 닦고 연마하며 겨울을 났다. 그중 한 곳이 바로 청룡사 옆 골짜기 불당골이고 그 남사당패를 개다리패라 불렀다.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바우덕이는 5살 때 개다리패에 들어와 모든 기예를 완전히 숙달했다. 1863년 꼭두쇠 윤치덕이 죽자 단원들 만장일치로 15살 바우덕이가 꼭두쇠가 됐다. 남사당패 최초의 여성 꼭두쇠였다. 2년 뒤인 1865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며 부역에 나온 백성들과 일꾼들을 위로하고자 전국의 이름난 사당패를 불러 모았을 때 바우덕이 개다리패는 최고의 인기였다. 풍물놀이부터 버나(접시돌리기), 살판(재주넘기), 어름(줄타기), 덧뵈기(탈춤),덜미(인형극) 등 못하는 놀이가 없었고 솜씨도 최고수였다. 그런 재주와 기량을 나타낸 노랫말이 처음에 적어놓은 바우덕이 찬가다. 대원군은 이 남사당패에 정3품 벼슬과 옥관자를 하사했고 이후 다른 남사당패가 바우덕이패를 만나면 옥관자가 달린 바우덕이패의 깃발에 자기들 깃발을 숙여 예의를 갖춰야 했다.

 

바우덕이 묘의 묘비. 바우덕이 본이름은 김암덕(金岩德, 1848~1870)이다. 묘도 실전됐던 것을 근래에 다시 찾아 정비하고 묘비와 상석도 갖췄다.

 

당대의 톱스타 바우덕이는 23살에 폐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노랫말처럼 모든 서러움 훌훌 털고 바람을 날리며 떠나갔을까? 가슴이 시리다.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청룡사 사적비. 숙종 46년(1720) 청룡사 중수를 마치고 이를 기념해 세웠다. 사당패는 모든 불사에 보시금을 냈다.

 

청룡사 승탑군은 낮은 돌담에 둘러싸여 있어 포근한 느낌을 준다. 석종형이라서 조선시대에 조성됐다는 것을 알려준다. 종 모양이 포탄 모습이 됐다.

 

승탑군 오른쪽 골짜기가 바로 남사당들이 겨울을 지냈던 불당골인데 사당패의 후손들이 살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우덕이 사당과 동상도 있다.

 

누석단, 돌무지 등으로 부르는 이 돌무더기는 사찰 가는 길에도 가끔 있다. 나쁜 기운 모두 털고 간다는 의미로 지나가면서 돌을 얹어 놓는다.

 

고려 말 나옹 스님이 청룡사를 중창할 때 상서로운 구름 속에 청룡이 나타났다 하여 서운산(瑞雲山) 청룡사(靑龍寺)로 바뀌었다. 전의 이름은 대장암이었다.

 

옛날 조그만 문 위에 걸려있던 청룡사 현판. 죽농 안순환(1871~1942)이 1928년에 썼다. 그는 마지막 궁중 요리사로 명월관을 세우기도 했다.

 

청룡사 대웅전은 보물이나 목재가 노후화돼 2016년부터 해체복원 작년 12월에 마쳤다. 숭례문 이후 최초로 전통 안료인 석채, 토채를 썼다.

 

국보나 보물급 건물에는 임의로 단청을 입힐 수가 없다. 화학 안료를 쓰면 단청이 비바람에도 쉽게 변색하고 건물 보호도 안 된다. 용마루에 청기와도 얹혔다.

 

용마루에 청기와가 있는 것은 왕실과의 인연 때문이다. 기와를 보면 둥그런 수막새 기와에는 ‘옴’자가, 암막새 기와에는 중수날짜가 쓰여있다.

 

대웅전 측면 기둥들은 제대로 곧게 뻗은 목재가 없다. 굽으면 굽은 대로, 가늘면 가는 대로 활용해 써서 조선 목수들의 자유로운 기량을 한껏 자랑한다.

 

뒷면 기둥들을 봐도 곧고 단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한껏 흥 오른 남사당패가 자유롭게 춤추는 듯하다. 하기야 대웅전 불사에도 사당들이 크게 시주했다.

 

새로 한 단청이지만 전통 안료를 썼기 때문에 화학 안료보다 훨씬 안정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서까래에도 빈틈없이 문양을 넣어 온 정성을 다했다.

 

추녀 끝 목재 절단면에 금강역사를 그렸다. 사천왕문도 없으니 대웅전 추녀 네 귀퉁이에 금강역사를 그려 넣은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보려고 온 것이다.

 

성재 김태석(1874~1951)의 명부전 현판이다. 그는 추사의 제자 소당 김석준에게 사사했다. 서예가, 전각가로 대한민국 국새 1호 글씨도 썼다.

 

청룡사에 왔으니 가까이 있는 천안 천흥사지도 들렸다. 고려 초 왕실 사찰로 추정되는 곳으로 탑이 5층으로 커지기 시작할 때의 작품이다. 보물로 지정됐다.

 

보물 천흥사지 당간지주도 명작이다. 탑하고 멀리 있어 창건 당시의 절 구역이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깃발을 거는 당간(幢竿) 기둥은 사라졌다.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돌기둥인 당간지주만 남아 있지만 힘차면서도 세련됐다. 기단부 귀퉁이에 가는 융기선을 넣었는데 처마 선을 본뜬 것이다.

 

안상은 단조로울 수 있는 조형물에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시작된 것인데 그 안에 여러 가지 조각이 등장한다. 고려시대 여의두문양.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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