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품은 지리산] 불모佛母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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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품은 지리산] 불모佛母의 땅
  • 박부영
  • 승인 2021.12.2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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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품은 화엄華嚴의 물결
화엄사 각황전과 석탑. 각황전 사방에 『화엄경』을 새긴 석경(石經)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숙종 28년(1702)에 다시 지었다. 5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웠다.

지리산은 한국불교를 잉태하고 낳은 어머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야 남방 불교가 이곳에서 시작했고 화엄(華嚴), 선(禪), 외적과 맞선 호국불교, 불교개혁, 근대에 들어와서 계율, 선, 승려교육, 정화에 이르기까지 불교 교학 수행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뿐인가. 음악, 차 등 불교 문화도 지리산이 보듬고 키워 세상으로 내보냈다. 가야불교로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지금도 진행 중이다.  

지리산(智異山)은 불교 산이라고 한다. 봉우리, 계곡, 암벽마다 고승의 자취가 서리지 않은 곳이 없고, 가람 곳곳에 이 땅 불교 역사가 짙게 드리운다. 이름 자체가 불교에서 나왔다.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舍利菩薩)의 지(智)와 리(利)를 따 지리산이라 불렀다. 깨침을 얻은 스님이 보림을 하는 산이라는 의미로 큰스님을 칭하는 방장산, 문수보살이 사는 청량산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 주봉도 천왕봉이 아니라 문수보살이 중생 제도를 위해 근기에 맞춰 나툰 반야봉이다. 연하봉, 관음대, 제석봉 등 수많은 이름이 불교에서 나왔다.

불교가 지리산 품에서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크고 넓은 품과 풍부한 수량 덕분이다. 지리산은 경남, 전남북 3개 도에 걸친 넓은 부지에다 계곡은 물론 산 곳곳에 지하수가 샘솟는다. 땅이 부드럽고 넓어 스님들 수행처로 최적이다. 산 아래 넓은 들을 앞에 둔 화엄사, 쌍계사 두 개 교구본사와 구산선문 중 한 곳인 실상사 모두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끼고 있다. 산 아래 대찰뿐만 아니라 지리산 높은 곳에 자리한 상무주암, 도솔암, 법계사 등 암자에도 물이 샘솟는다. 특히 화엄사 도광 스님이 오랫동안 찾아 지리산을 뒤졌다는 전설이 전할 정도로 꼭꼭 숨은 도솔암도 맑고 깨끗한 물이 지금도 콸콸 샘솟는다. 지리산의 이러한 특성은 1940~1950년대 빨치산이 숨어든 배경이 됐다.  

 

화엄의 바다 

불교 역사 순으로 보면 구례와 하동 중간 섬진강변 위의 칠불암이 최초다. 남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김해에 불교를 전했다는 수로부인과 김수로왕 사이에서 난 일곱 아들이 출가해 수행한 뒤 부처가 됐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전설처럼 전하는 칠불암을 잇는 다음 역사는 화엄사를 중심으로 하는 화엄불교다. 화엄은 우리나라 최초로 교학과 신앙이 결사(結社)로 체계화한 불교사상이다. 종교는 학문 연구 과정을 거쳐 신앙 조직 결사 단계를 거쳐 성쇠를 반복한다. 한국불교 역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신앙 단계를 넘어 결사와 조직화 단계에 접어든 것이 소백산에서의 의상 화엄이며 약 200여 년을 지나 지리산 화엄사가 의상 화엄을 바탕으로 두면서도 새롭고 진취적인 화엄을 만들었다. 그 흔적이 우리나라 유일의 화엄사 화엄석경(華嚴石經)과 금니사경이다. 화엄사의 화엄은 경주 중심의 화엄이 옛 백제 땅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금니사경을 주도한 인물은 남원, 구례 등 화엄사 인근 장인들이었으며 이를 주관한 인물도 이 지역의 유력자들이었다.   

화엄사의 진취적이며 개방된 사상적 열정과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주체적 불교 수용은 화엄사가 선(禪)도량으로 전환하는 자양분이 되며, 후삼국 시대에 견훤을 후원하는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한다. 

지리산 사찰 암자 창건주로 등장하는 연기(緣起) 조사는 인도 승려가 아니라 통일신라시대 의상계 화엄과 다른 자장계통 원효의 영향을 받은 화엄학승으로 보인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지리산 자락의 사찰과 암자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연기 조사보다 혁신적인 화엄교학에 그 시원을 대는 것이 더 어울려 보인다. 

신라 중대 화엄은 후기에 선(禪)을 낳는다. 화엄에서 선으로 이전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신라 화엄학계가 받아들인 현수법장은 해인삼매(海印三昧)를 가장 중시했다. “번뇌가 다 없어져 마음이 맑아서 만물이 모두 나타나는 세계”를 ‘해인’이라 하고 선정을 통해 그 경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백성이 고통받고 어지럽던 통일신라 말, 화엄학승들은 교학의 단계를 넘어 보다 진취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선으로 뛰어들었다. 해인삼매가 개인의 선정을 넘어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것이 화엄삼매이니 화엄세계가 구현되도록 일상생활에서 적극 실천하는 것이 보살의 역할이다.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으니 내가 곧 부처’라는 이 혁명적 사상은 지리산을 일거에 뒤덮었다. 

그 문을 연 이가 도의와 홍척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 당 서당지장 문하에 입실했다. 육조 혜능의 제자 마조도일의 상수 제자가 서당이니 이 땅에 선이 도입된 것은 꽤 빠른 편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도의는 처음 경주 근처 울주 석남사에 머물다 설악산으로 들어가 제자를 양성했고 그 제자들이 후대 가지산문을 일군다. 가장 먼저 선을 들여온 도의가 당대에 산문을 형성하지 못한 것에 비해, 홍척은 도의보다 귀국은 늦었지만 산문을 가장 먼저 형성한다. 828년 지리산에 실상사를 창건하고 실상산문(實相山門)을 형성했으니 우리나라 최초의 선문(禪門)이다. 그 이래로 지리산은 선의 요람이 되어 오늘날까지 수많은 명안 존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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