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진안 은수사·천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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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진안 은수사·천황사
  • 노승대
  • 승인 2021.12.16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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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개마고원이 있다면 남한에는 진안고원이 있다. 개마고원은 평균 해발 1200m의 너른 지대로 백두산의 화산폭발로 형성됐기에 보통 한반도의 지붕이라 불렀고, 진안고원은 무주, 진안, 장수지역에 걸쳐 평균 해발 400m의 평탄 지역이어서 호남의 지붕이라 했다.

이 세 지역을 보통 ‘무진장’이라 불렀으니 전라도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였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에도 철도가 지나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철도길은 없다. 고속도로도 2001년 11월에 통영-대전 고속도로가 겨우 완공됐으니 그만큼 개발의 바람이 불지 않았던 곳이다.

개발이 늦어진 만큼 무진장지역은 당연히 풍광이 뛰어난 곳이 많다. 무주에는 구천동계곡과 덕유산, 적상산이 있고 장수에는 백운산, 장안산이 있어 지지계곡, 덕산계곡, 토옥동계곡 등 길고 맑은 계곡들이 많다. 그래서 지역 이름도 ‘장수(長水)’라 했다

진안은 그중에서도 빼어난 산과 계곡을 두루 갖췄다. ‘진안’ 하면 마이산과 탑사가 떠오르지만 운장산과 구봉산도 뛰어난 산이고 천황사 고찰이 천년의 적막을 안고 전나무 숲 그늘에서 세월을 맞고 있다. 애석하게도 용담계곡은 용담댐이 완공되면서 수몰되었기에 신재효의 <호남가> 속에 “용담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처며~”로 남아 소리로만 들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진안에는 ‘운일암반일암 계곡’이 있다. 솟구친 절벽 사이 깊은 숲 계곡이라 구름만 지나간다 해서 운일암(雲日岩)이고 해가 반나절만 든다 해서 반일암(半日岩)이니 계곡을 차지한 크나큰 암석들 사이로 세차게 흘러가는 맑은 계류가 속진에 찌든 마음을 단번에 씻어준다.

 

마이산 남쪽 초입 탑영제 연못에서 바라본 풍광. 앞산이 암마이봉이고 뒤쪽에 상부만 보이는 봉우리가 수마이봉이다. 곧 암수 한 쌍의 봉우리가 솟아 있다.

암마이봉 아래에는 이갑룡(1860~1957) 처사가 25세에 산에 들어와 40세 무렵부터 30여 년간 쌓은 108기 돌탑 중 80여 기가 남아있다.

 

기가 모이는 곳으로 알려진 이 탑사에는 물그릇의 고드름이 거꾸로 생기는 현상이 있다. 역고드름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이갑룡 처사도 98세를 살았다.

 

마이산은 역암층이다. 역(礫)은 ‘자갈 역’자다. 지각변동으로 자갈, 모래, 퇴적층이 뒤섞여 바위로 굳어지고 풍화로 자갈이 빠져나가면서 큰 구멍이 생겼다.

 

두 봉우리 사이는 천왕문이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금강으로 달리고 남쪽으로 가는 빗물은 섬진강으로 흐른다. 물길이 달라지는 분수령이다.

 

수마이봉 아래는 은수사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지리산 인월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하고 전주로 가는 길에 이 산에 들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은수사의 샘물. 이성계가 이 샘물을 먹고 ‘은같이 맑은 물’이라고 해서 절의 이름이 은수사(銀水寺)가 됐다. 650년 수령 청실배나무도 곁에 있다.

 

마이산 이산묘는 의병활동 근거지로 뒷날 연재 송병선, 면암 최익현을 기리고 고종과 이름난 선비, 애국선열들의 모시고 제사를 올리면서 이산묘가 됐다.

 

이산묘 옆 바위에 새겨진 주필대 각자. 주필(駐蹕)은 임금이 거둥할 때 잠시 머물거나 묵고 간다는 뜻으로 이성계가 왔다 간 것을 기념해 새긴 것이다.

 

마이산은 태종 이방원이 다녀가며 ‘말 귀를 닮았다’하여 마이산(馬耳山)이 됐지만 신라 때부터 나라에서 제사를 모시던 명산이다. 암벽의 능소화줄기.

 

구봉산 천황사 초입의 승탑. 길을 판석으로 깔고 양옆에 작은 꽃나무도 심었다. 두 기의 승탑 주위로 작은 담장도 둘렀다. 옛 스승을 모시는 정성이다.

 

천황사는 전나무들이 좋다. 절 입구 전나무는 태풍 루사로 위쪽이 잘려 나갔지만 수령은 830여 년이라 한다. 남암의 전나무는 천연기념물 제495호다.

 

천황사는 신라시대 무염 국사가 875년에 처음 지은 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여러 번 중건됐다. 목재의 크기가 적당해서 안정적이고 중후한 느낌을 준다.

 

대웅전 내부 벽화에는 비천상들이 일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조선 말기 민화가 절집에 들어오기 전의 양식이다. 지워진 벽화들은 무엇이었을까?

 

불상 밑의 수미단에도 연꽃 줄기와 함께 물고기가 조각돼 있다. 임진왜란 후 다시 지으면서 화재방지를 위해 나타난 양식이다. 물고기가 사니 불이 나겠나?

 

용담면 천태산 계곡은 옥류천, 옥폭동이라 부르는 맑은 계곡으로 조선시대에도 이름이 높았다. 옥천암이라는 암자가 지금도 있다. 물은 마치 옥처럼 투명하다.

 

천변 바위에는 조선 말기 용담 군수였던 김기중(1859~1933)의 각자도 있다.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으니 그가 바로 김성수다.

 

김기중은 김성수가 중앙고보, 보성전문(현 고려대) 등 육영사업과 동아일보를 창간할 때 적극 후원했던 깨인 인물이었다. 절경을 이루는 용담호의 풍광.

 

운일암반일암 계곡은 운장산 동북쪽 명덕봉과 명도봉 사이 큰 협곡으로 기암절벽, 덩치 큰 바위, 풍부한 계류가 어울린 절경이다. 도덕정에서 바라본 모습.

 

언뜻 보면 큰 바위가 포개진 모습이 마치 부처님 모습과 같다 하여 대불바위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바위 인근이 가장 뛰어나서 많은 사람이 찾는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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