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 근대 불교와 산신신앙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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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 근대 불교와 산신신앙의 갈등
  • 서재영
  • 승인 2021.11.24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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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와 성철 스님의 산신 철폐론
암자 뒤에 산신각이 있는 문경 봉암사 백운대. 사진 유동영.

산신은 우리나라 토속신앙이지만 여러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종교현상이다. 우리나라 역시 국토의 70%가 산지로 구성되고, 마을마다 산을 끼고 있어 산신신앙은 토속신앙으로 자리 잡아 왔다. 산신신앙은 자연현상에도 영혼이 있다는 산악숭배(애니미즘)와 호랑이를 숭배하는 동물숭배(토템이즘)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여기에 한민족의 시조설화와 결부되면서 신격과 인격적 특성까지 부가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신의 아들인 단군은 지상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1,500년 간 다스린 후 산신이 됐다고 한다. 백발의 노인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기호노인(騎虎老人)의 모습으로 산신을 조성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한반도에서 산신은 산악숭배와 동물숭배를 바탕으로 하되 여기에 천신과 인격적 의미가 더해져 민초들의 신앙으로 널리 숭배돼 왔다.

 

토속신앙과 불교의 습합

불교의 특징 중 하나는 입향수속(入鄕隨俗)이라는 전통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하듯이 불교는 새로운 지역으로 가면 해당 지역의 풍속을 따르고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이런 자세로 불교는 국제적 혼성문화가 꽃을 피웠던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다. 토착신앙과 마찰을 피하고 상생과 공존을 추구하는 것은 세계종교로 성장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물론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됐을 때는 산신과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점차 습합과정을 거치면서 상생의 길을 걷게 됐다. 삼국시대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 일월성신(日月星辰) 등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례들이 많이 행해졌다. 하지만 불교가 지배적 종교가 되면서 이 의례들은 불교의식으로 대체됐다. 토착신앙이었던 산신도 자연히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의 하나로 수용됐다. 심지어 고려 인종 때는 승려 묘청의 요청으로 백두산을 비롯해 한반도의 큰 산에 불보살의 이름을 부여하고 숭배하게 했다.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국가에서 산신신앙을 적극 권장한 셈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사찰에는 삼성각이 건립되고 산신·칠성·독성을 모시기도 했고, 지역에 따라 산신각이 독립 당호로 건립되기도 했다. 나아가 『석문의범』 같은 의례집에도 각단예불 편에 산신청 내용이 수록된 것을 볼 때, 산신은 불교신앙의 일부로 정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7~18세기 들어 불교가 쇠락하자 불교의 하위신앙으로 흡수됐던 산신과 민간신앙의 위상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 혼란기였던 19세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면 더욱 뚜렷해진다. 전국의 명산과 사찰은 물론 각 마을이나 심지어 집집마다 산신이 모셔지면서 민족종교와 같은 위상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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