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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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12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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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원음

 

근본불교
저작·역자 이중표 정가 17,000원
출간일 2021-11-12 분야 불교
책정보

판형 152mm×225mm|책등 두께 15mm|

ISBN 978-89-7479-954-0 (03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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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붓다의 원음,

모든 불교의 뿌리,

‘근본불교’를 말하다

저자 이중표 명예교수는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와 대승불교의 연결고리를 연구해 온 한국 불교학계의 석학이다. 대승불교 전통인 한국에서 『아함경(阿含經)』, 『니까야(Nikāya)』가 소승, 남방불교 경전으로 치부되어 주목받지 못하던 시기부터 그는 이 분야 연구에 매진해 왔다. 이유는 명쾌하다. 『아함경』과 『니까야』를 모든 불교의 뿌리인 ‘근본불교’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교 최초기, 붓다의 원음이 가장 잘 간직된 근본경전 『아함경』, 『니까야』의 바른 이해는 곧 대승불교의 바른 이해로 이어진다. 대승불교 전통인 한국에서 이 분야가 더욱 연구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때 ‘원시불교’, 또는 ‘초기불교’라고도 불렸던 이 분야에 관해서 이중표 명예교수는 분명히 말한다. “근본경전을 통해 전승되는 붓다의 가르침을 모든 불교의 근본이라는 의미에서 ‘근본불교’라고 불러야 한다.”

저자의 바람대로 이 책 『근본불교』는 불교의 원류를 찾아가는 길을 제시한다. 중도(中道)·연기(緣起)·열반(涅槃) 등 불교 핵심 교리를 왜곡 없이 붓다의 원음으로 통찰할 수 있다.

저자소개 위로

이중표 (전남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전남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정년 후 동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 위촉됐다. 호남불교문화연구소 소장, 범한철학회 회장, 불교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불교 신행 단체인 ‘붓다나라’를 설립하여 포교와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정선 디가 니까야』, 『정선 맛지마 니까야』, 『정선 쌍윳따 니까야』, 『붓다의 철학』, 『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불교란 무엇인가』,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외 여러 책이 있으며, 역서로 『붓다의 연기법과 인공지능』, 『불교와 양자역학』 등이 있다.

목차 위로

머리말

1장_근본불교란 무엇인가

1 근본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2장_근본불교의 이해를 위한 기초

1 불교의 목적

2 인간의 근원적 괴로움

3 불교의 진리-4성제(四聖諦)

4 올바른 세계관-정견(正見)

5 붓다의 침묵과 중도(中道)

3장_붓다 당시의 사회와 사상

1 당시의 인도 사회

2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사상

3 자이나교의 사상

4장_근본불교의 중도설(中道說)

1 사견의 근원과 멸진

2 자작타작중도(自作他作中道)

3 단상중도(斷常中道)

4 일이중도(一異中道)

5 유무중도(有無中道)

6 고락중도(苦樂中道)

7 수정주의(修定主義)와 8정도(八正道)

5장_업설(業說)과 연기설(緣起說)

1 업보(業報)와 연기(緣起)

2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3 무아(無我)와 업보(業報)

4 중생의 세계

5 업설(業說)과 연기설(緣起說)

6 삼종외도(三種外道) 비판

7 업보(業報)와 마음

6장_12입처(十二入處)

1 참된 나

2 거짓된 나

3 6입처(六入處)와 6근(六根)

4 6입처(六入處)와 6근(六根)의 관계

7장_18계(十八界)

1 18계(十八界)와 촉(觸)의 발생

2 식(識)과 명색(名色)

3 18계(十八界)와 6계(六界)

8장_5온(五蘊)

1 근본불교의 존재론적 입장

2 5온(五蘊)의 근원

3 5온(五蘊)의 발생과 성립

4 5온(五蘊)의 의미

9장_12연기(十二緣起)와 4성제(四聖諦)

1 유전문(流轉門)과 5온(五蘊)

2 환멸문(還滅門)과 8정도(八正道)

3 연기(緣起)의 의미

10장_열반(涅槃)의 세계

1 법(法)과 법계(法界)의 의미

2 중생의 5취온(五取蘊)과 여래의 5분법신(五分法身)

3 3독심(三毒心)과 보리심(菩提心)

4 무아(無我)와 열반(涅槃)

상세소개 위로

한국 ‘근본불교’ 연구의 맥을 짚어보는 시간

근본불교는 소승불교가 아니다

불교 교단은 붓다 사후 18~20개의 부파(部派)로 분열하여 교리의 해석을 놓고 대립한다. 이러한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라는 운동이 불교계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이 대승불교의 시작이었다. 대승불교는 이들 부파불교를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비판했다. 소승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교리 해석과 개인의 깨달음에만 몰두한 채, 중생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모습을 꼬집는 멸칭(蔑稱)이었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불교 교단의 성립과 분열, 그리고 다양한 해석의 논서들이 불교 초창기부터 형성되었다고 해서, 『아함경』 및 『니까야』와 같은 최초기의 근본경전이 부파불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근본경전은 부파와 대승이 함께 공유한 경전이자,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들어진 경전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근본불교는 분열 이전의 불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대승불교가 비판한 소승불교, 즉 부파불교와는 엄연히 구별된다. 대승불교 성립 이후에 집필된 여러 경전의 뿌리는 당연히 근본경전이다. 저자 이중표 명예교수는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대승불교 사상이 근본불교와 비교하여 다소 상이한 점과 과장된 면이 있지만, 이를 걷어내면 근본불교 사상과 일치함을 알 수 있고, 오히려 대승불교가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근본불교 사상을 되살렸다는 진실에 눈 뜰 수 있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가 나올 수 있었던 계기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이자 저자 이중표 명예교수의 은사였던 고익진(1934~1988) 박사의 공이 컸다. 근본불교 연구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1970년대부터 고익진 교수는 근본불교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이해는 근본불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불교의 다양한 교리가 어떻게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저자는 고익진 교수의 가르침에 힘입어 「아함의 중도체계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와의 연관성을 면밀히 밝히는 데 평생을 바쳤다.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근본불교가 대승불교와 근본에서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중관(中觀), 유식(唯識), 화엄(華嚴) 등의 대승 사상이 근본불교와 같은 맥락임을 드러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근본불교의 이해가 곧 대승불교의 이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교의 목적을 알아야

근본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불교에 관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옛 고찰(古刹) 대웅전에 모셔진 거대하고 화려한 불상과 장엄하게 꾸며진 불단은 잠시 잊자. 붓다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열망으로 출가를 결심했다. 특별한 게 고통이겠는가. 육신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게 고통이다. 생명은 모두 고통을 겪는다. 정말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특별하다. 너무나 어렵다.

붓다가 살았던 시대는 도처가 죽음이었다. 질병으로 죽고, 굶어 죽고, 전쟁으로 죽고, 차별받아 죽었다. 짐승과 곤충 같은 생물까지 시야를 넓히면 상황은 더 참담하다. 대부분 살이 찢겨 잡아먹히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생명 있는 존재가 천수를 누린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사방은 죽음으로 넘쳐나는데 본능은 끊임없이 삶을 추구한다. 살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이리저리 날뛰어 보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붓다는 출가했다.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을 너무나도 잘 안 붓다는 남의 괴로움도 잘 알았다. 계급, 인종에 따라 고통의 강도가 다를 리 없다.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것 따위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체감했을 것이다. 붓다 당시에도 인도는 신들의 나라였다. 이름을 모두 나열할 수 없을 만큼 신이 많았다. 하지만 그는 신들이 살아있는 생명을 돕지 않는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예상컨대 신들을 부정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시작했다. 정말 신은 있을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스스로 되뇌었겠는가. 하지만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핵심은 ‘마음’이었다. 마음의 껍질을 벗기고 잘게 쪼개보았다. 힘든 싸움이었지만, 고도의 집중력과 생명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 있다면 한계비용은 제로였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죽을 각오도 되어있다.

드디어 그는 깨달았다. 마음속에는 자아(自我)라는 생각, 분별심이 사라졌다. 그를 옭아매던 번뇌는 적멸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주리라 결심했다. 대상은 무차별이었다. 인종, 성별, 계급을 따지지 않았다. 태반이 글씨조차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중생들을 대상으로 붓다는 대화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대화했다. 상대를 살피고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게끔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인내심 같은 건 없었다. 참고 견디는 인내라는 아량은 ‘내가 인내하고 있다’라는 번뇌에 빠진 자들이나 떠올리는 생각이다. 붓다는 그렇게 45년 동안 차별 없이 자신과 대화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나주었다.

근본경전에 나오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담백하고, 뼈를 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승불교가 성립하고 중관(中觀), 유식(唯識) 같은 정밀한 교학 체계를 보면 정말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붓다가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근본불교를 접하면 이러한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불교의 목적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붓다는 그 방법을 잘 정리된 수행 체계로 제시했다. 수행의 대상은 본인의 마음이다. 마음에 관해서는 지겨울 만큼 많은 비유와 설법으로 제자와 중생들에게 설명했다. 이 내용이 원음으로 담긴 것인 근본경전이고, 이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 바로 ‘근본불교’이다. 이 맥락을 놓치면 근본불교는 물론 대승불교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은 불교를 공부할 때 놓치기 쉬운 이러한 맥락을 정확히 짚어준다. 저자의 30년 불교 내공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붓다의 애절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정밀한 답!

초기불교와 근본불교는 같은가? 다른가?

‘근본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이 불교 역사에서 단순히 초기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전 역사를 통해서 전개된 모든 불교의 근본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불교는 언제, 무엇이 왜곡되었는가?

붓다 입멸 이후 여러 교단으로 나뉘면서 가르침이 달라졌다. 그 과정에서 대승불교는 왜곡된 불교 이해를 바로잡고, 불교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려는 의도에서 나타났다. 근본불교를 통해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잘 계승하여 발전시킨 대승사상을 확인한다.

무아 · 중도 · 연기 · 열반의 원류를 좇다

불교 최초기의 내용이 담긴 『아함경』과 『니까야』는 불교의 ‘근본경전’이다. 근본경전을 통해 전승되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중도·연기·열반 등 불교 핵심 교리를 왜곡 없이 붓다의 원음으로 통찰한다.

붓다는 형이상학적 관심에 정말 무관심했을까?

붓다는 세계의 유한성과 무한성, 영혼의 존재 유무 등에 대해 침묵했다. 이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붓다가 형이상학적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근본경전을 면밀히 살펴 붓다의 침묵은 중도(中道)를 드러낸 것으로, 불교 이해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책속으로 위로

고익진 선생님의 연구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와 크게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일본 학자들은 12연기, 4성제, 8정도, 5온, 12처, 18계와 같은 개념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고익진 선생님은 붓다의 깨달음이 어떤 구조와 체계로 우리에게 설해지고 있는지에 주목했다. 즉, 12처, 18계, 5온, 12연기 등은 낱낱의 개별적인 교설이 아니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불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것이며, 이후 근본불교 연구에서 한국불교의 특징이 되었다. _7쪽

예를 들면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라는 말은 용이 실재해야 의미 있는 말이 된다. 그러나 용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즉 의(義)에 상응하지 않으므로 이 말은 무의미하다. 붓다는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마치 ‘용은 청색인가, 황색인가’라는 문제처럼 무의미한 말장난으로 본 것이다. _43쪽

예를 들어 아버지는 고혈압이고 어머니는 저혈압이라고 하자. 자이나교의 견해는 이 두 사람의 아들은 저혈압과 고혈압이 합해졌으므로 혈압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붓다는 이들의 아들은 고혈압과 저혈압이 동시에 있는 더욱 심각한 병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래서 붓다는 사견을 종합하지 않고 버리도록 했다. 사견은 아무리 모여도 결코 정견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견은 모이면 모일수록 더욱 허망한 사견이 될 뿐이다. _65쪽

따라서 중생이나 세간, 영혼 등이 ‘인연의 화합에 의해 존재하는 유위’라는 말은 이들이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인연이 업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다시 ‘모든 존재는 진리에 무지한 무명의 상태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연기(緣起)는 업보(業報)와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연기설은 불교의 업설이라고 할 수 있다. _105쪽

외도가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은 존재하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고, 붓다가 이야기하는 ‘일체는 무상하다’는 말은 ‘모든 것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으므로 잠시라도 지속하고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_107쪽

우리가 말하는 존재는 ‘인식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보이면 있다고 말하고, 들리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존재의 근원은 인식이다. _117쪽

‘5온은 무상하다’라고 말한다. 무상하다는 것은 그 속에 어떤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을 불경에서는 ‘5온은 무아다’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_135쪽

근본불교의 교리는, 12입처(十二入處)는 18계(十八界)로 발전하고, 18계는 5온(五蘊)로 발전하며, 5온은 12연기(十二緣起)로 발전한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상적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연기설은 12입처에서 시작되어 12연기에 이르는 전 과정을 의미한다. _146쪽

예를 들어 어떤 것을 보고 느낌이 생기면 아름다움과 추함,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하고 있다가 아름다운 꽃을 보면 아름답다고 느끼고, 더러운 오물을 보면 괴롭게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미추와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본래부터 있다가 즐거운 것을 보면 즐겁게 느끼고, 괴로운 것을 보면 괴롭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부를 때 먹으면 괴롭다. 만약 고락을 느끼는 감정이 존재한다면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즐거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고플 때는 맛없는 것을 먹어도 즐겁고, 배부를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괴롭다는 것은 감정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감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감정은 촉에서 생기는 것이지 본래부터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_191쪽

우리가 생사의 세계에서 윤회하는 것은 식(識)이 사라지지 않고 머물면서 커감으로써 ‘나’라고 하는 존재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식은 이렇게 생사윤회의 근본이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를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식이라는 존재가 죽지 않고 생사윤회를 거듭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를 오해하는 것은 이렇게 식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_199쪽

육신(색수음)이란 4대와 4대로 만들어진 존재라고 중생들은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깨닫고 보니 물질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2입처라는 허망한 마음에서 생긴 무상한 것이다. 중생들은 이 무상한 육신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는 나의 육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육신은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즉 인연 따라 변화하고 있는 법(法)이다. 그러므로 나를 이루고 있는 존재가 육신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없애고, 그런 생각을 남김없이 끝까지 버려야 한다. _211쪽

연기라는 법칙은 연기하는 법과 별개의 현상이 아니다. 연기하는 법, 그곳에 진여인 연기가 있다고 하듯이 연기하는 현상인 법과 그 현상이 있게 한 법칙인 연기의 법칙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연기를 보면 법을 보고 법을 보면 연기를 본다’는 붓다의 말씀과 같이 연기라는 법칙을 보게 되면 모든 현상이 그 법칙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현상에 연기라는 법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_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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