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국과 불교] 조선시대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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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과 불교] 조선시대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 양혜원
  • 승인 2021.10.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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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인정하는 스님의 조건
출가와 도첩度牒 제도
한양도성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 후기 한성부 행정 구역 전체를 포괄하는 지도로, 붉은 점선을 통해 한성부 오부(五部)의 경계를 나타냈다.

 

백성 가운데 승이 3할

태조 4년(1395) 2월, 대사헌 박경(朴經) 등은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린다.

“나라의 도승(度僧)은 정해둔 수효가 없고, 백성 가운데에 승(僧)이 3할은 되는데, 그중에 부역할 수 있는 자가 3분의 2는 될 것입니다. 대개 승은 세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배부르게 먹지 않고 일정한 곳에 거처하지 않으며 승당(僧堂)에서 마음을 닦는 자가 상(上)이요, 법문을 강설하고 말을 타고 바삐 돌아다니는 자가 중(中)이요, 재(齋)를 맞이하고 초상집에 달려가서 먹고 입는 것을 엿보는 자가 하(下)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옵건대 하급의 승을 국가 공사에 일하게 하여 무엇이 해가 되겠습니까?”

조선은 개국하고도 한동안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에 그대로 있다가 태조 3년 10월에야 한양 천도를 단행한다. 이에 한양은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서 본격적으로 개발되는데, 당장 궁궐과 성을 축조하기 위해 수만 명의 인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백성들을 차출해 부역을 시키다가 봄이 되어 농번기가 닥치고 이들을 더 잡아둘 수 없게 되자, 대사헌 박경 등이 승 가운데 하급 부류를 불러서 일을 시키자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위 사료는 불교사에서 살펴볼 만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여럿 중첩돼 있다. 여기서 스님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는데, 청정하게 수행하는 스님을 가장 높이 치는 점은 이 시기 『조선왕조실록』에서 누차 등장하는 언급이다. 다음으로 법문을 강설하면서 말을 타는 경우는 승직(僧職)을 가진 스님들로 추측할 수 있는데, 이들을 두 번째 부류로 꼽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도들이 올리는 재를 설행하거나 초상집에서 명복을 빌어주고 사례를 받는 일을 주로 하는 경우를 가장 하류로 분류해, 이들은 부역 대상으로 삼아도 문제없으니 백성 대신 도성 건설 공사에 동원하자고 건의했으며 이는 받아들여졌다. 

예나 지금이나 청정수행에 매진하는 출가자에 대한 존경은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 

더불어 눈에 띄는 내용은 ‘백성 가운데 승이 3할’이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란 부역을 질 수 있는 남성을 지칭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중 3할이라니 눈을 의심할 정도로 많은 수치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중국 『송사(宋史)』 고려전에는 ‘고려의 인구는 총 210만 명으로, 병사, 백성, 승(僧)이 각각 3분의 1씩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저런 과도한 수치 안에는 다양한 성격의 승이 포함돼 있겠지만, 일단 이미 고려시대부터 출가하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나치게 많은 승도(僧徒) 수는 새로이 건국된 조선이 직면한 심각한 사회문제 중 한 가지였다. 그들은 생산 활동에 종사하지 않고 국가의 부역을 면제받거나 회피하므로 승의 과도한 증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부담 증가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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