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가 개창하기까지 수많은 조력자가 존재한다.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보답하기 위해 건국자는 공신을 책봉해 벼슬을 내리고 대대손손 영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각종 혜택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은택 중에서도 단 하나, 왕위계승권은 여러 사람에게 나눠줄 수 없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를 두고 개국 초에 여러 난이 발발하고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반복된 역사다.
조선 개국 이후 왕실 내에는 왕위를 둘러싼 난이 수차례 발생했다. 때로는 이복형제끼리 때로는 친형제끼리 왕위를 향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패배한 이들은 목숨을 잃었고, 그들 뒤에 남겨진 이들은 오욕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남겨진 자들의 결말은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유배를 가거나 혹은 노비가 되거나. 그런데 왕실 여성들에게는 이를 피할 수 있는 제3의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비구니가 되는 길이었다. 출가는 세속의 모든 명예를 포기하는 동시에 패자의 과보를 면죄 받는 것이었다. 내명부(內命婦, 궁중 안에 살면서 품계를 받은 여인)의 직위를 박탈당한 여성들은 노비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승려가 됨으로써 누군가의 아내도, 딸도, 며느리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왕실 여성들의 출가처, 정업원
조선왕조가 개창된 지 7년째 되던 해인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난이었다. 한때 이성계의 가장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왕조 개창의 최고 조력자였던 이방원은 태조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반발해 배다른 형제인 방번, 방석 그리고 경순공주의 남편인 이제(李濟)까지 살해했다. 그리고 방석의 세자 책봉을 비호했던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들도 함께 처단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어린 두 아들과 사위가 사망하자 태조는 경순공주에게 비구니가 될 것을 권유했다. 경순공주는 신덕왕후의 소생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딸이었다. 실록에는 경순공주의 머리 깎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성계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고 기록돼 있다. 이 난으로 남편을 잃은 방석의 부인 심씨 또한 정업원(淨業院)을 통해 비구니가 됐다. 방번의 부인 왕씨는 방번의 묘 근처에 절을 세우고 남편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후 태조는 왕위를 내려놓고 이 절, 저 절을 주유하며 세월을 보냈다. 죽을 때까지 이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이성계는 말년에 자신의 사저를 흥덕사라는 절로 개조해 방번 형제와 이제를 위한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방석의 부인 심씨가 정업원에 들어갈 당시에 정업원의 주지는 고려 공민왕의 후비였던 혜화궁주 이씨였다. 이씨는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한 뒤 공민왕의 후사를 낳기 위해 후비로 책봉됐다. 하지만 이씨는 공민왕의 후사를 낳지 못했고, 공민왕이 살해당한 후 정업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됐다. 그리고 정업원에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을 지켜봤다. 혜화궁주 이씨가 세상을 떠난 후 방석의 부인 심씨가 정업원의 주지직을 이어받았다.
왕조의 교체와 상관없이 정업원은 고려와 조선 왕실 여성들의 출가처로 이용됐고, 선왕의 명복을 비는 왕실원당으로 활용됐다. 본래 개경에 있던 정업원은 조선의 한양 천도와 함께 도성으로 이전해 왕실 비구니 사찰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정업원은 창덕궁 바로 옆(오늘날의 원서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유학자 관료들은 정업원의 폐사를 거듭 주장했다. 이로 인해 수차례 철폐와 복설이 반복됐지만 왕실 여성들의 비호 아래 정업원은 조선 후기까지 도성 내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정업원은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갈 곳을 잃었거나 후사가 없는 왕실 여성들이 여생을 보내는 사찰로 이용됐다. 왕실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사찰이라는 가장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지킬 수 있었다. 한때 왕 또는 왕자의 아내였던 여성이 다른 사내의 부인이나 첩이 된다면 이는 여러 곤란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스스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변의 피해자가 된 왕실 여성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정쟁의 피해 여성들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비구니 사찰을 운영했다.
조선 왕실이 난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왕실 비구니원을 운영한 것만은 아니었다. 왕실 내의 출가자들을 관리하고, 왕실 구성원들의 불교 신앙을 보조하기 위해 궁궐 인근에는 비구니 사찰이 필요했다.
조선 전기에는 익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왕실 여성들이 승려가 됐다. 태종이 사망한 직후 의빈 권씨 등 태종의 후궁들이 은밀히 출가를 단행한 데 이어 신빈 김씨, 혜빈 양씨 등 세종의 후궁들도 세종이 사망한 날 밤에 집단으로 출가했다. 곧이어 문종의 후궁들도 출가했고,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도 자수궁 비구니가 됐다. 후궁들의 출가 행렬은 성종 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내명부에 소속된 여성들은 출가한 이후에도 궁을 나갈 수 없었다. 이들은 비록 출가했다 하더라도 내명부의 품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궁 안에서 거주할 의무가 있었다. 대신 이들은 선왕 후궁들에게 배정된 궁을 사찰로 개조해 살아갔다. 하지만 스스로 머리를 깎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가와 수행 생활을 보조할 승려와 사찰이 필요했다. 그 역할을 수행한 곳이 정업원 등의 왕실 비구니원이었다.
왕실 비구니원이 유지됐던 가장 큰 이유는 왕실 내에 불교 신앙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국가에서는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고 유교 중심의 국가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지만, 1,000여 년간 불교를 통해 가족의 안녕과 극락왕생을 빌어왔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불교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교는 사후 문제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의 여성들은 불교식 추천의례를 계속 이어나갔다. 조선 전기의 왕비들은 대부분 고려 구 귀족 집안 출신으로, 대부분 독실한 불자 집안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왕비나 후궁이 된 이후에도 불교 신앙을 이어나갔다. 왕실 비빈들은 물론 상궁이나 일반 궁인들까지 불교를 신앙했기 때문에 이들의 불사를 대행할 사찰과 승려가 필요했다.
창덕궁 바로 곁에 위치했던 정업원은 점차 규모를 키워가며 하나의 승방(僧坊)을 형성했다. 『경국대전』에 도성 내 승려 출입을 금지한다는 법령이 기재된 이후에도 왕실에서는 궁 바로 옆에 붙어있는 비구니 사찰을 비호했고, 직접 주지를 임명하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출가여성 최고의 안전지대
조선 전기 내내 정변은 끊이지 않았고, 정업원으로 들어오는 왕실 여성들의 행렬은 계속 이어졌다. 1453년(단종 1) 발발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뺐기 위해 일으킨 난이었다.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사망하고 13살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동생 안평대군도 죽였다. 단종은 영월로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그 결과 다수의 왕실 여성들이 폐서인으로 전락했다.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는 도성에 남아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고, 단종의 후궁 권중비는 공신의 노비가 됐다.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는 남편 정종과 함께 유배 가서 노비형에 처했다. 순천부의 노비가 된 공주에게 순천부사를 노역을 시키려고 하자, 공주는 “왕의 딸에게 수령이 감히 사역을 시키냐”고 호통을 치며 거부했다. 하지만 곧이어 정종이 모반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주살(誅殺)되면서 경혜공주는 한양으로 이송됐다. 여전히 노비 신분이었던 공주가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정희왕후의 배려 덕분이었다. 정희왕후는 세조에게 “경혜공주를 박대해서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읍소했고, 그로 인해 경혜공주는 관노의 신분임에도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경혜공주는 3살 된 아들과 1살 된 딸을 살리기 위해 정희왕후의 도움을 받아들였다. 공주는 어린 자식들을 정희왕후에게 맡기고 자신은 비구니가 됐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세종의 며느리인 수춘군부인 정씨도 정업원에서 출가했다. 정씨의 시어머니 혜빈 양씨는 세종의 사망 직후 비구니가 됐으나, 문종의 부탁을 받아 갓 태어난 단종의 양육을 맡았다. 수양대군에게 맞서 끝까지 단종을 지키려 했던 혜빈은 결국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됐고, 혜빈의 자식들 또한 연좌제로 사사됐다. 비록 수춘군이 요절해 사사되지는 않았지만 혜빈의 며느리인 수춘군부인 또한 연좌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피하고자 수춘군부인은 정업원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됐다.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숙의 곽씨 또한 정업원의 비구니가 됐다.
이처럼 조선 전기 내내 정업원은 내명부 직위를 박탈당한 여성들의 은신처가 됐고 그 명맥은 조선 후기 현종 대까지 이어졌다. 궁궐 바로 옆에서 염불과 범종 소리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유학자 관료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끊임없이 정업원의 폐사를 요청했다. 하지만 정희왕후, 소혜왕후, 인혜왕후, 정현왕후, 문정왕후 등 대비로 물러나 있던 여성 불자들은 유학자들의 비판에 온몸으로 맞서며 정업원을 보호하고 조선 불교의 방패막을 자처했다. 이들에게 있어서 정업원은 스스로의 불심을 지키는 공간인 동시에 참회의 공간이었다. 남편 혹은 시아버지가 일으킨 정쟁의 결과물로 참혹한 삶을 살아가던 왕실 여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왕비들은 정업원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통해 왕실의 업보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했다.
누군가에게는 참회의 공간이었던,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피난의 공간이었던 정업원과 안일원, 인수원, 자수원 등의 왕실 비구니원은 정쟁의 풍파 속에서 약 270여 년간 유지됐다. 처음에는 왕실 여성들의 귀의처였던 이곳은 점차 사대부가와 일반 여성들의 출가처로도 확대됐고, 하나의 비구니 동네를 형성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사대부가의 여성들도 왕실과의 인연을 통해 정업원에서 출가했는데, 이곳에서 출가하면 시가나 친정에서 함부로 환속을 요구할 수 없었다. 출가여성들에게 있어서 정업원은 조선의 한복판에 위치한 최고의 안전지대였다.
일반적인 관점으로 볼 때 정업원에 들어간 여성들은 조선에서 가장 슬프고 애달픈 삶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를 통해 이들은 죽음보다 못한 굴욕의 삶을 피할 수 있었고 신분과 성별, 가문의 굴레를 벗어나 무애자재(無碍自在)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정업원은 조선에서도 가장 밝은 궁궐 아래에 존재하는 지극히 은밀하고 안전한 장소였다. 조선 왕실이 스스로의 음지를 밝혀준 불교를 끝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사진. 유동영
탁효정
순천대 학술연구교수. 조선시대 불교사 전공. 안동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술로는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대법사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