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패러다임 전환의 시대
불교는 4세기 후반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한국인의 사유와 관념, 종교와 문화의 기본 틀을 바꾸어 놓았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치며 1,000년 동안 불교는 토착화에 성공했고 한국의 주류 전통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러나 1392년 유교의 기치를 높이 든 조선이 건국하면서 유불(儒佛) 교체라고 하는 상징적 전환이 일어났다. 고려 말 조선 초를 가리키는 여말선초, 조금 더 길게 보아 14~15세기는 불교에서 유교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시기였다.
14세기는 동아시아 세계의 체제 변동기로서 원에서 명,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가 이어졌고,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를 대신해 무로마치 막부가 세워졌다. 특히 중국에서 몽골족을 쫓아내고 한족이 세운 명이 중원을 재편하면서 중화 체제가 다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고려 유학자 관료들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나누는 화이론(華夷論)의 세계관과 성리학을 앞세워, 불교를 오랑캐의 종교이자 이단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고려 말 유학자들은 불교에 대한 비판과 이념적 공세의 강도를 점차 더해갔다. 이는 사원의 경제력과 불교계 세력이 지나치게 컸던 현실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학계를 대표하는 높은 평판과 정치적 위상을 갖고 있던 이색은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공민왕이 즉위한 1351년 올린 상서에서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이익을 위한 소굴이 되고 놀고먹는 백성들이 많습니다. 도첩(度牒, 출가한 승려에게 나라에서 발급하던 일종의 신분증명서)이 없는 승려는 군대에 충당하고 새로 창건한 사찰은 철거하며 양민이 함부로 승려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며, 현실적 폐단에 대해 따끔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인다.
불교를 배척하는 배불(排佛)의 목소리는 정치·경제와 관련한 현안뿐만 아니라 윤리와 내세관처럼 불교와 유교가 자주 부딪혀온 문제에 대한 정면충돌로 불길이 옮겨붙었다. 불교는 부모와 군주를 저버리고 인륜을 도외시하는 오랑캐의 가르침이며, 인과응보와 윤회 등 터무니없는 혹설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왔다는 것이 비판을 일삼은 유학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그렇지만 사원이 막대한 토지와 10만 명이 넘는 노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고려 말까지는 불교에 대한 대대적인 억불정책이 취해지지 않았다.
월간불광 특집 기사 전문은
유료회원에게만 제공됩니다.
회원가입후 구독신청을 해주세요.
불광미디어 로그인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