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안의 문화이야기] 봉화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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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봉화 청량산
  • 노승대
  • 승인 2021.10.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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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맞으러 봉화 청량산에 다녀왔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산이기도 하고 역사적으로도 돌아볼 유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서산대사는 산에 대해서 품평하는 말씀을 하셨다. 산은 빼어남[秀]과 웅장함[壯]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웅장함이 부족하고 지리산은 웅장하지만 빼어나지는 않으며 산 중에서는 묘향산이 웅장하면서도 빼어나다고 평했다. 청량산은 작은 산이다. 작은 산인데도 빼어나고 웅장한 맛이 있다.

청량산은 신라의 명필 김생이 연마하던 김생굴의 흔적이 남아있고 최치원이 마셨다는 샘도 있다. 퇴계 이황이 들어와서 공부하던 오산당 유적이 있는가 하면 공민왕과 얽힌 전설들도 있다. 지금은 청량사와 응진전만 남아있지만 예전에는 골골마다 26개소의 암자와 토굴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는 이 산을 너무 좋아했고 스스로 ‘청량산인’이라 했다. 그러니 시 한 수가 없을 수 없다.

청량산 6·6봉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 12봉 아는 이는 나와 흰 갈매기,
갈매기야 어디 가서 떠들겠냐만 못 믿을 것은 복숭아꽃이네
복숭아꽃아, 물에 떠서 가지 마라 어부들이 알까 두렵구나)

※ 청량산이 바로 무릉도원이니 무릉도원의 복숭아꽃이 물에 떠내려가 어부들이 이곳을 찾아올까 봐 두렵다고 빗대어 시로 읊으신 내용.

 

청량산 탐방로는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 봉화군에서 잘 정비해 놓았다. 필요한 곳만 계단이나 데크를 설치해 맨땅을 밟는 즐거움이 있다.

 

퇴계는 숙부가 지은 오산당에서 『논어』를 배우며 학문을 시작했다. ‘우리 집안의 산에 있는 집’이라는 뜻에서 오산당(吾山堂)이라 했다. 별칭은 청량정사.

 

연화봉 절경. 청량산은 퇴계의 5대조 이자수가 나라에서 하사받은 산이다. 퇴계는 “청량산을 가보지 않고는 선비 노릇을 할 수 없다”고 종종 말했다.

 

청량사 초입의 동자승 조각. 뒷짐을 지고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귀엽고 앙증맞다. 잘 가꾸어진 소담스러운 국화꽃들과 자연석 축대, 저절로 마음이 풀어진다.

 

산비탈을 계단식으로 정리해 장독대를 만들고 정연하게 항아리들을 세웠다. 절집에 들고 나는 신도들과 손님들이 먹을 장이지만 그 손길이 정성스럽다.

 

어느 때인가 절을 중창할 때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세 뿔 소를 마을 사람이 시주했다. 그 소는 절에 오자 고분고분 모든 짐을 다 져서 올렸다.

 

절이 낙성되자 세 뿔 소는 죽었고 지금 자리에 묻혔다. 무덤에서 소나무가 싹이 터 자라면서 세 가닥으로 갈라졌기에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부른다.

 

청량사는 오랜 세월 돌보는 이가 없어 법당과 허름한 요사채 하나뿐이었다. 탑도 근래에 조성했다. 왼쪽 절벽 아래에 김생이 수도했다는 김생굴이 있다.

 

청량사 유리보전과 뒷산 풍경. 조선후기 건물이며 안에는 보물 제1919호 약사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유리보전은 곧 약사전이라는 뜻이다.

 

청량사는 원효대사가 663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신라시대 창건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물증은 바로 이 석축이다. 자연석을 이를 맞춰가며 쌓는 방식이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까지 내려왔고 그때 청량산성에 들어와 머물기도 했다고 한다. 유리보전 현판은 공민왕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청량사에서 남쪽으로 바라다본 풍경. 정면에 보이는 봉우리가 축융봉이며 둘레 16km에 이르는 청량산성이 있다. 산성 안에 공민왕 사당이 있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은 임진왜란 이전인 1578년에 조성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쪽 발을 내린 특이한 양식이며 완성도도 높다. 보물 제1666호.

 

뒤에 보이는 금탑봉은 9층금탑이 구름 위에 솟은 듯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 이제 금탑봉 아래 절벽 사이 아슬한 소로길로 돌아가며 하산할 것이다.

 

금탑봉 아래 총명수. 이 샘물을 마시면 머리가 총명해진다는 전설이 있다. 최치원도 이 샘물을 마셨다 하고 그 곁에 치원암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금탑봉 아래 바위 암벽에는 유람객의 각자가 여럿 있다. 관찰사 이조원(李祖源, 1735~1806)은 1790년 8월 한용구, 황창원과 함께 유람했다.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산. 12봉우리가 반원형으로 둘러싼 산 중턱에 청량사가 편안히 앉았다. 단풍철에 음악회를 열면 온 산이 울림통이 되는 명소다.

 

금탑봉 주위에는 5개의 암자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응진전 한 곳만 남았다. 노국공주가 기도했다는 전설이 있고 공주를 닮은 조각상도 안에 안치돼 있다.

 

어느 노승이 이 절터를 잡고 법당 뒤 절벽 위 암석을 내려놓았다. 아침에 보니 다시 그 자리에 올라가 있어 동석(動石)을 그대로 두었다 한다.

 

청량산에 오니 650년 내력의 농암종택을 안 들릴 수 없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문장에 뛰어났고 효자로도 알려졌다. 장수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사진. 노승대

 

(필자의 카카오스토리에도 실린 글입니다.)

 

노승대
‘우리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조자용 에밀레박물관장에게 사사하며, 18년간 공부했다. 인사동 문화학교장(2000~2007)을 지냈고, 졸업생 모임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인사모)’, 문화답사모임 ‘바라밀 문화기행(1993년 설립)’과 전국 문화답사를 다닌다. 『바위로 배우는 우리 문화』, 『사찰에는 도깨비도 살고 삼신할미도 산다』(2020년 올해의 불서 대상)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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