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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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1.09.29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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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코미술관 ‘정재철:사랑과 평화’ 리뷰
아르코미술관 <정재철: 사랑과 평화> 전시 중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 전시 전경.

지난 7월부터 8월까지, 동숭동에 있는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정재철 작가의 유고전 <정재철: 사랑과 평화>가 열렸다. 한때 목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90년대 후반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예술가들에게 입주할 공간을 제공해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거치며 세계를 뒤덮은 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사는 인류를 포함한 생명체, 그리고 사물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작고 직전까지 약 20년간 전 세계를 떠돌며 자신의 몸을 매체로 작업했다.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이었던 그. 예술로 세상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다줄 방법을 찾으려 했던 한 유랑 작가의 삶과 예술을 살펴보았다.

 

길을 종이 삼고 몸을 붓 삼아

정재철 작가의 대표적 작품 <실크로드 프로젝트>(2004-2011)는 근대 이전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교역 경로였던 실크로드를 따라 국가 간 경계를 넘으며 소비문화의 상징인 폐현수막을 나누어주고, 그 과정에서 맞닥뜨린 우연한 만남, 교류, 사건과 상황을 만들고 기록한 작업이다. 전시장은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각종 기록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오브제, 사진, 영상, 텍스트 기록물이 흩뿌려진 전시실에서 작가의 경험을 온전히 전달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의 본질은 몇 년에 걸쳐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한 작가와 각 지역 사람들의 경험과 순간들 그 자체이지 않은가. 관람자가 그 흔적을 따라가며 자신만의 순간에 자신만의 메시지를 생성해내는 것이야말로 삶을 예술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전시장의 모호함 속에서 길을 잃기보다는 시간과 일상에 대한 작가의 태도, 그리고 예술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한 예술가의 방식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여행했다.

 

걷기, 한 걸음 한 걸음 충실하게

여행자가 되어 길을 나서는 일은 그에게 예술적 실천이자 태도이며 방식이었다. 크고 무겁고 견고한 마스터피스가 아니라 먼 길 떠나는 여행자들도 충분히 지고 다닐 수 있을 법한 작은 오브제들과 노트, (현수막) 천, 영상 기록물들로 채워진 소박한 전시장에서, 일상의 순간순간을 정성으로 대했을 작가의 마음을 느꼈다. 어느 한 시점에 한 장소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나타내는 기록들, 날짜와 지출 내역, 프로젝트 일정 등과 더불어 자신이 보낸 시간을 꼼꼼히 손수 글로 남겨 놓은 작가의 노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는 썼다. 여행이란 “현재를 (특별한) 새로운 과거로 만들기 위한 일종의 게임”이라고. 그리고 그 게임의 룰은 일상의 생경함을 제거하고 다만 분별하려는 습에 맞서 오직 “충실하게 다음 발걸음을 떼놓는 것”이라고. 

“영원한 것은 없다. 돌로 잘 만든 견고한 성채도 시간 앞에선 기울고 사람도 소도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뿐-.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은 시간의 궤적을 담고 흘러간다. 변화하고 있는 것만이 있었다. 변화하고 있는 공간에 시간이 꽉 차 있다. 어쩌면 시간과 공간이 나눠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그것은 하나였을 것이다. 변화하는 공간 속에 시간이 담겨있고, 시간 속에 공간이 담겨있다. 서로 충만한 상태로-. 그리고 그것이 변화하고 있음으로 해서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이 찰나조차도, 그 찰나에 충만한 공간조차도.”

- 2003년 1월 22일 故 정재철 작가노트 중

정재철 작가 노트 발췌 모음집 <사유의 조각들> (연구·편집: 이아영) 발췌

 

아주 작은 사랑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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